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월 Feb 01. 2024

쉬어라, 꽃 필 때까지

— 휴거혈거 철목개화(休去歇去 鐵木開花)



휴거혈거 철목개화(休去歇去 鐵木開花)


불교 선종의 한 갈래인 임제종(臨濟宗)에서 주요한 지침서로 삼고 있는

벽암록(碧巖錄)의 일구(一句)다.


쉬고 또 쉬면 쇠로 된 나무에 꽃이 핀다는 말이다.

쇠막대가 꽃을 피울 리 없으나

선사(禪師)의 말씀이 그리 가벼울 리야.


안드레이 아르세니예비치 타르코프스키(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감독의 유작인 <희생>(犧牲, Offret, Sacrificatio, 1986년 작품)은 참으로 깊은 울림을 준다.

(죽기 전이나 세상이 종말을 맞기 전 영화 한 편을 보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영화를 다시 볼 것이다.)

영화사 백두대간이 예술영화전용관인 <동숭시네마텍>을 짓고 처음 건 영화가

이 작품인데

영화 중반 7분? 꽤 긴 시간 동안 롱 테이크로 찍은 장면이 있다.

그냥 풀밭이 펼쳐져 있고 말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인데

그걸 그냥 쳐다본다.

하지만 이 장면은 정말 중요하고, 꼭 필요한 장면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는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뇌는 인식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정지하려 하였다.

영화관을 나와서 물으니 거의 모두가 이쯤에서 숙면을 취했더란다.

나는 오기로 버텼으나 이게 대체 뭐냐 비명 지를 즈음

일순 머릿속이 환해지고 잠도 확 달아나고

온몸이 환해졌다. 개운하다 정도로 표현하긴 아쉽다. 몸이 온통 환해졌다.

나는 그때부터 영화에 진짜로 빠져들 수 있었다.

거리를 두고 분석하고 해독하려던 시도를 멈춘 대신

영화를 호흡할 수 있었다.

본래 영화가 그렇게 하게끔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이 비탈길을 제대로 오를 수 있도록

숨 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이 롱 테이크가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서 주인공 남성은 목 수술로 말하지 못하는 자기 아들과 함께

나무에 물을 주며 옛 수도승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죽은 나무를 거꾸로 심고는 삼 년 동안 물을 주면

잎이 날 거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꼬박 삼 년 동안 거르지 않고 물을 길어다 주었다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러나 너는 침묵하는구나, 마치 말없는 작은 물고기와 같이…”



주인공의 희생 다음에

아이는 여전히 나무에 물을 주러 다니고 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는

아들 고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게 뭐야, 아빠?”



나는 롱 테이크를 보아야 했고,

알렉산더는 아무런 변명 없이 붙잡혀 가야 했고,

옛적 수도승은 스승의 말을 따라

삼 년 동안 죽은 나무에 물을 주어야했다.

아이는

죽은 나무에 물을 준다.


영화 맨처음에

우리는 스크린에 가득 찬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본다.

그리고 영화가 끝이 나며 카메라가

죽은 나무를 따라 위로 올라간다.


우리는 그 끝을 보지 못했다.



한 사람이, 한 세상이 태어나는 것,

한 사람을, 한 세상을 구원하는 건

긴 침묵

긴 기다림

뜻 모르는 오래고 오랜

되풀이를 원한다.


응답도 보상도 바라지 않는 행위만이

순수한 변화를 가져다 준다.


무엇이어도 괜찮다.


사람은,

그렇게 크고

그렇게 키운다.








이전 05화 귀납의 한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