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월 Feb 15. 2024

큰 가슴

— 선한 가슴




나의 할머니는 모든 사람은 세상을 바꿔 놓을 만큼 큰 가슴, 선한 가슴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쳐다보는 말(아르볼 루킹 호스) | 라코타 족 



라코타 족 ‘쳐다보는 말’은 큰 가슴, 선한 가슴에 대하여 말합니다. 

자신의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라는 것은 

조상들의 지혜가 대대로 내려온 것을 

지금 자기 입으로 전할 뿐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마치 성경 저자들이 ‘성령의 영감에 따라’ 쓴 ‘기록자’일 뿐 

‘저자’가 아니라고 자신을 낮추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자가 자신을 낮춘 자리에 

거짓이라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그게 그럴 만한 참이라면 저 뒤에서

더 큰 빛이 비추어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선설과 성악설을 대비하여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듯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는 인간 본성의 천연 속성을 말하는 것이고(맹자, 성선설) 

다른 하나는 인간 본성의 사회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순자, 성악설). 


이는 ‘도덕은 사회적’인 것이라는 

철학 일반의 결론과 궤를 같이 합니다. 


달리 어떻겠습니까. 


도덕은 인간적입니다. 

사회적입니다. 

인간에게서 비롯하고, 인간만이 그것을 원하는 데 다다르기 때문에 

인간만이 이것을 ‘알고’(다시 말해, 분리해서 선택 가능한 상태로 거리 두고) 

이것을 ‘행하기’(다시 말해, 분리했고, 배출된 그것을 선택해 하나가 되는 결정을 매순간 결행할 수 있어) 

때문에 

도덕은 인간적이고, 

인간은 도덕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타고나지만 

인간의 정신은 길러집니다. 

태어난 정신은 헐벗어 

육신을 입고도 

그것이 못내 괴롭습니다. 

인간정신은 스스로를, 그리고 전부를 의심하기 일쑤입니다. 

그것이 본래 인간정신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타협하거나 저주하거나 

환상을 짓고 삽니다. 

그러나 인간정신은 다름 아닌 자기 도피의 이 행위를 직시하고 

이것들을 의심하여 

사라지게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진실이 아닌 것을 배제함으로써 

진실만이 남게 합니다. 

그것을 보아도 

투명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기압이 떨어지면 입자들이 흩어지고 온도가 떨어지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추워서] 괴로울 뿐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 먼지가 거기 있다면, 

먼지를 일으키는 고통, 이전에 아주 작게라도 타 버린 것이 있으면 

뿌연 구름이 생성됩니다. 

이로써 보이지 않는 현상은 

보이는 현상으로 관측됩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는 

안락함보다는 괴로움 속에서 

더 높이 꿰뚫어 봅니다. 


만질 수 없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영향 또한 크지 

없거나 작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 

그 한계는 우리의 결여이고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일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 줍니다. 

내가 여기 누워 

당신이 여기 누울 수 없습니다. 

내가 이 옷을 입어 

당신이 이 옷을 입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짜가 아니라 진짜인 이상 

우리는 서로를 배척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 명백하게 진술할 수 있는 건 단지 하나 

‘나는 너가 아니다’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슴은 작지 않습니다. 

우리 가슴은 ‘선’합니다. 

‘선한 가슴’이란 

비록 내가 한 부분이지만 

전체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본래 전체인 듯, 

전체-나로서 

세상을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선한 가슴은 

큰 가슴입니다. 

그래서 본래 선한 인간 본성은 

악해지는 ‘타자와의 관계’를 

나남 구분을 지우며 

경계를 허물어 

‘더 큰 나’로 삼습니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더 작은 나’에 대해 ‘더 큰 나’가 바로 ‘신’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언자』 중에서). 


그 자체로 선하나 

마주치며 서로를 해치고… 

그대가 먹는 것은 감사하고 찬란한 일이나 

그대를 먹이는 것들은 

그대에게 먹히는 것이고 

만일 그들이 먹히는 데 시선을 둔다면 

그것은 참혹하고 공포스럽고 괴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들이 단지 먹히지 않고 먹이지 않는다면. 


그대는 안으로는 선하고 

밖으로는 악합니다. 

그대가 배우지 않는다면. 


가르치는 이가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이가 

‘먹히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배우는 이는 

뭣도 모르는 사람에서 

뭘 좀 아는 사람이 됩니다. 

무엇을 아는가. 

우리를 잇는 관게성, 우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먹고 

먹인다. 

그래서 살아간다. 


그래서 배운다는 건 

내가 이 세상에 쓸모없지 않다는 걸 아는 것입니다. 

내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믿고, 찾아 아는 것이요, 알아서 더 믿는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건 

     알 수 있다고, 

     그럼으로써 할 수 있다고. 


     너는 먹히지 않아. 

     너는 온세상을 먹일 거야. 

     온 세상이 너를 통과해서 

     자기 자신이 되는 거야. 

     그들을 자기 자신으로 만들면서 

     너도 자기 자신이 되는 거야. 

     그러니 잠들렴,

     마음 놓고 꿈꾸렴. 



이야기해 주는 것. 

부추기는 것. 

그렇게 

같이 걷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같이 걷는 모두를 

뒤엉킨 타자를 

있는 그대로, 그들을 억지 부려 바꾸거나 

바꾸어 생각하지 않고도 

먹지만 

먹이는 이라고 

믿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구상에서 어머니 대지를 파괴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당신이 결정해야 한다. 

피할 길은 없다. 

우리들 각자는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지금 이곳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신이 이토록 중요한 시기에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사람들을 

세상에 내보내리라고 생각하는가?” 

— 쳐다보는 말(아르볼 루킹 호스) | 라코타 족




우리는 

선합니다. 선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악합니다. 

악할 수 있으니까. 


배운다는 건 

숨은 듯 심겨 있는 선할 마음을 틔우고 

큰 가슴을 가르치는 것. 

선한 가슴으로 숨 쉬게 하는 일-입[이어야 합]니다. 




할머니는 또 위대한 정령은 결코 우리가 다룰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주는 법은 없다고 하셨다.**

— 쳐다보는 말(아르볼 루킹 호스) | 라코타 족 










*/**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김영사, 2003, 732쪽. 




이전 07화 초-능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