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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Jan 11. 2024

두 개의 정신

— 합하는 마음과 나누는 마음



두 개의 마음이 있다.

마음은 정신이다.


정신은 오로지 밖을 향하여 자신을 의심치 않는 동안

세계와 자신을 하나로 느낀다.

그저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함을 느낀다.

진실하다.


정신은 세계가 세계를 끊임없이 낳고 변화하는 것을 바라본다.

정신도 스스로 낳고 키운다.

그리고 정신과 정신이 마주본다.

정신은 이제 안으로 돌이켜 자신을 보고

자신이 자신인지, 이 자신과 저 자신이 같은지

다를 뿐 아니라 어쩌면 자신은 가짜요, 저 자신이 진짜인 건지

나는 그저 나에게 도구였을 뿐인지 혼란을 겪는다.

다정한 마음은 차갑게 식고

분별하고 가리고 당기거나 밀쳐낸다.


전자는

분석하고 추론하는 사고다.

분석하여 낱낱이 쪼개지만 그래서 온통 애써

‘너머’의 보이지 않는 법칙을 찾는다.

의심 가득하지만

바로 그 의심으로 ‘이건 믿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의심과 회의, 조그만 상처로도 무너지는 두 번째 정신은

그러나 그렇기에 오만하고

조금씩 안도하며 자만하며

질문하되 질문받을 때 상처받는다.

그리고

믿는 것을 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너는 믿고 있을 뿐이다.]


후자는

형상을 직관하는 사고다.

그것을 그것으로 충분히 알아볼 때까지

몽롱한 이 정신은 그러나 거기서 멈추고

거기서 믿고 알아볼 줄을 안다.

처음에는 자기가 상상하는 대로인 줄 알지만

차츰 구별하고, 그것들이 환대하거나

적어도 같은 슬픔을 먹고 사는 줄 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금세 도전받고

자기를 알아채고 자신에 매달리며 아픔과 불안이 된다.

첫 번째 정신은 자신이 이미 안 것을,

그렇게 해서 스스로 살고,

두 번째 정신을 낳았으나 이 권능의 뚜렷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을 믿는다고 고집한다.

[그러나 너는 이미 알고 있다.]



두 개의 정신은 태어나면서와

이갈이를 하면서 깨언나다.

그러나 이대로는 불완전하다.

이제 평생이 차갑다, 외롭다.

자기를 다치게 하든지

남을 다치게 한다.

그러나 이게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하나는 둘을 낳고

하나와 둘이서 셋을 이룬다.


둘이 마주보고 어루만지면,

이윽고 서로를 믿고 한 곳을 바라보면

서로를 보고 의심하거나

일치를 요구하는 대신

둘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그냥 알고, 그냥 믿고

그래서 그냥 걸어가면

두 발 번갈아 딛듯

저절로 나아간다.

이제 경험하고

깨우치고

겸허하면서도 안심한다.


한 번은 복으로 주어지고

다시 한 번은 있는 힘껏 애써서 얻어야 한다.

그러고도 녹슬지 않게

갈고

굶주리거나 흉포하지 않게

먹이고 돌보아야 한다.


이 순환을 열어 다른 이들과 만나야 한다.

다른 정신과 만남으로써만

한 사람 안의 정신은 스스로 만나고, 자라날 수 있다.

성숙하고도 병들지 않으려면

다른 정신과 계속해서 만나고 대화해야 한다.

그럼으로써만 건강할 수 있다.

헛것에 홀리고, 헛것에 들려 헛심을 쓰지 않을 수 있다.


두 개의 정신은

둘이 아니다.

그러나 명확하게 둘이다.

그래서 둘은 함께 하나인데, 하나라고 부를 수 없고

셋이다.


정신은 언제나 삼체(三體)인데

한 몸 안에 하나이니 삼위(三位)라 부른다. 이게 맞다.


삼위일체는

역사적이다.

구체적이다.

그가 만나고, 낳고, 이제 스스로 만나 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사를 무궁하게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반복해서만 새롭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차성징 발현을 즈음해 두 번째 정신은 첫 번째 정신을 죽이려 한다.

둘은 하나이고, 첫째와 둘째 사이 우열이 있지 않아 말릴 수 없다.

그것을 말리는 것이, 그 세계와의 만남이

건강한 세계와의 만남, 세계에 대한 올바른 해석,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 맺기가

자기 자신을 분열과 파탄에서 구해낸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난 정신은 셋이다.

두 개의 정신으로 셋의 정신, 새 정신을 낳는 것이

바로 개념을 잡는 것이며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고

기꺼이 올바른 형식을 받아들이고, 올바른 형식을 더 정확하게는, ‘자기’를 낳아

제 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렇게 세우면 교육이고

이걸 못하고 안 하면 세뇌 시도일 뿐이다.


그런데 아프다.

아프니 괴롭다.


그러므로

아프고 괴로운 걸 꺼리고 피하면

영영 불안과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대는 꼭

아프라, 괴로워하라.


기꺼이

기꺼이

기꺼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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