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을 토대로 토론할 때 이신우는 매번 내 의견과는 대치되는 의견을 내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괜히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속으로 ‘재수 없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은 “방금 발언은 제가 좀 재수 없었죠?”라고 말하길래 화들짝 놀랬다. ‘알고 있으면 다행이네요’라고 대답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른 곳보다 비싼 멤버십 독서 모임은 대체 뭐가 다른지 궁금해서 호기심 반, 오기 반으로 등록한 모임이 어느새 6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한여름에 만나 짧은 가을을 지나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 이르는 반년 동안 멤버들은 종종 바뀌었지만, 이신우는 내가 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쭉 있었다. 생긴 건 흐물흐물한 아이스크림처럼 생겼는데 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을 날카롭게 이야기해서 더 괘씸하고 짜증이 났다.
종신형 모임은 매월 한 번씩 만나는 독서 모임 내에서 생긴 별도의 번개모임으로 윤종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독서 모임은 월 1회만 오프라인으로 만나는지라 돈독한 친목 도모를 위해 그 안에서 번개모임을 만들어 필수로 한 곳에 속해야 하는 게 룰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게 필요한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종신형 모임은 다른 번개모임처럼 오프라인 모임을 자주 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이신우도 종신형 모임의 멤버였다는 점을 뒤늦게 알았다는 점이다. 같은 취향인 것도 정말 재수 없다.
연말 윤종신의 공연 소식에 종신형 모임은 그렇게 제대로 된 첫 오프라인 모임을 하게 됐다. 공연 후, 늦은 저녁을 함께 먹고, 작은 선물을 교환하자는 의견까지 나오니 모처럼 설레고 신나기도 했다. 나는 한남동에 있는 편집숍에서 겨울 양말 몇 켤레를 골라서 포장하고 그 위에 향수를 살짝 뿌렸다. 은은한 머스크 향기 덕분에 괜히 들뜬 연말느낌이 나는 것도 같았다.
공연이 끝난 직후 우리는 와인바로 자리를 옮겼다. 선물교환은 사다리 타기를 하기로 했다. 내 소중한 양말이 재수없는 이신우한테만 가지 않기를 빌었지만, 나는 어려서 학교에 다닐 때부터 ‘설마’하는 일이 100% 당첨되던 언럭키걸이었기에 이번에도 ‘걔만 아니면 돼!’의 ‘걔’에게 내 선물이 가버렸다. 재수없다 진짜. 더 재수없는 건 이신우의 선물도 내게 와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받은 선물 포장에서도 은은한 머스크향이 났고, 이내 내가 뿌린 향수와 같은 향기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까.
우리는 각자 좋았던 곡들을 신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수목원에서’를 골랐고, 어떤 이는 ‘섬’을 말했다. 이신우는 ‘몰린’을 말했는데 나는 ‘몰린’을 말하려던 참이어서 대신 ‘탈진’이라고 대답했다. 한참 노래 이야기 하다 결국은 또 우리가 읽은 책에 관해 이야기하게 됐다. 11월에 읽은 <백년의 고독>에 이어 12월의 책은 <고독사 워크숍>이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우리의 모임이 그래서 정말 고독한 것 같다는 고독한 농담을 했다. 하나도 웃기지 않았지만 연달아 마신 와인 때문이었는지 피식 웃음이 나왔고, 동시에 맞은편 대각선에 앉아있던 이신우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