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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문진 Apr 03. 2024

불이 꺼지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낯선 언어를 듣는 이방인의 감각이 내가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여행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주기적으로 낯선 곳에 나를 밀어 넣고는 한다. 대만이라는 나라는 처음이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한밤에도 불이 켜져 있는 24시간 성품 서점에 방문하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들이 그곳에서 밤을 지나 새벽을 통과하는지 궁금했다. 혹은 노숙자들이 그곳을 임시거처로 이용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런 모든 걸 감수하고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가능한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거리에서 나는 냄새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서 이튿날이 되어도 힘들었지만, 타이베이의 거리는 신식과 구식의 모습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서 걸어만 다녀도 흥미로웠다. 특히 서점들이 즐비한 거리는 환상적인 느낌까지 받았는데 서울에서는 골목골목을 찾아다녀야만 볼 수 있는 독립책방도 꽤 많이 보였다.


이신우가 없는 독서 모임은 인정하기 싫지만 권태롭게 느껴졌다. 책을 읽고 단순한 느낌을 떠나 생각하지 못한 질문으로 의견을 주고받는다는 게 여전히 유용한 면은 있었지만 모임을 갈 때 마음 한쪽에 품고 있던 기대나 치열하게 오고 가던 대화의 재미는 없었다.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도 잠시 모임을 쉬기로 했고, 덕분에 겸사겸사 오랜만에 혼자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도무지 그칠 줄 몰랐고, 으슬으슬 컨디션도 좋지 않아서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 간판 없는 오래된 우육면 집으로 갔다. 식사 때가 아니어도 사람이 계속 가득했기 때문에 궁금했다. “부야오 샹차이”만 알면 된다던 블로거들의 말 덕분에 나는 고수가 들어가지 않은 우육면을 먹을 수 있었다. 연말 종신형 모임에 와인을 마시고 나와 새벽에 먹던 우동이 떠올랐고, 이신우는 왜 독서 모임을 그만둔 걸까 궁금해졌다. 인스타그램에 이름을 검색해봐도 그의 계정은 찾아볼 수 없었고, 생각해보니 SNS 같은 건 일절 안 할 것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편이 잘 어울렸다.


이미 해가 진 후였다. 숙소에서 조금 쉰 후 밤에 성품 서점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막상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게 귀찮아졌다. 하지만 주말을 낀 2박 3일의 짧은 휴가를 이렇게 흘려보낼 순 없으니 몸을 일으켰다. 서점 근처로 숙소를 예약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게스트 하우스 로비에서 일본 여자 세 명이 컵라면을 먹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니 허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식욕이 아니라 심리적 공허함은 아닐까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지도를 보고 있었다. 경쾌한 띵 소리와 함께 트렁크를 끌고 누군가 내렸다. ‘나랑 같은 향수 냄새’ 무의식에 고개를 들었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신우의 체크인을 기다렸다. 5분 뒤에 그가 다시 로비로 나왔다. “여기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오리온 생맥주 파는 이자카야 집 있던데 거기 어때요? 그리고 서점 갑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의 정체가 뭘까 혼란해졌다. 비가 그친 밤거리는 제법 쌀쌀했다. 2월 말, 겨울의 끝 무렵이었다. 추운 감각과 외로움을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고 있었지만 지금 이 기분은 얼떨떨함으로 가장한 반가움과 설렘이라는 걸 10분만에 인정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사람과 책을 매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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