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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문진 Apr 03. 2024

처음만 있고 마지막은 없는

문진은 1월 1일 새해가 되면 신춘문예 대상자들의 글을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생긴 루틴이다. 누구에게도 속에 있는 진심을 내뱉은 적은 없지만, 이번엔 어떤 주제의 글이 선택받았을까 하면서 ‘저런 글은 나도 쓰겠다’던가 ‘뭘 하던 사람들이 등단했을까?’ 하면서 ‘문창과 출신들이나 합평하던 스승과 제자 사이겠지 뭐’ 하는 근거 없는 시기심을 바탕으로 매번 글을 읽는다. 첫 문장만 읽어도 지루하게 느껴지는 당선작을 읽으면서 문진은 낙선하는 이유가 문단에 아는 선생님도 지인도 없고 출신학교도 주류가 아니어서 그런 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쓰는 일이 진부함을 깨트리는 일이라고 위안 삼으며 마음 한구석에 있는 미묘한 우월감을 끌어안는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기시감이 드는 문장을 발견했고, 문진은 별안간 잠이 깨는 듯했다.


[모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낯선 언어를 듣는 이방인의 감각이야말로 내가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여행이 좋았다. 나를 주기적으로 타국 땅으로 밀어 넣은 이유였다. 그리고 내가 대만에 온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한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고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성품 서점에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부분이 몇 가지 있었는데 첫째로는 영업적 손실 없이 서점 운영 유지가 가능한지, 둘째로는 어떤 사람들이 밤에 그곳을 머무르는 건지 궁금했다. 어떻게 노숙자들의 공간으로 탈바꿈되지 않는 걸까, 미국은 요즘 노숙자와 전쟁이라고 하던데 여긴 왜 다른걸까 하는 생각.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 몰랐고, 몸이 으슬으슬한 것이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한국은 눈이 많이 오ㄴ다. 잘 놀고 있ㄴㅣ.”‘응, 걱정마’라고 엄마의 메시지에 짧게 대답하고 사진을 몇 장 보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점심으로 시원하게 뜨끈한 국물을 먹고 싶었고 나는 숙소 근처에 있는 간판이 떨어진 우육면 집에 갔다. 식사 시간이 아니어도 사람이 계속 가득했기 때문에 며칠간 숙소를 오고 가면서 궁금했던 곳이었다. “부야오 샹차이”만 알면 된다던 블로거들의 팁 덕분에 나는 고수가 들어가지 않은 우육면을 먹을 수 있었다. 연말 종신형 모임에서 와인바를 나와 새벽 포장마차에서 먹던 우동이 떠올랐다. 이신우는 왜 독서 모임을 그만뒀을까? 또 궁금해졌다. 인스타그램에 이름을 검색해 봐도 비슷한 계정은 찾아볼 수 없었고, 포털사이트에 우리 독서 모임 이름을 검색해도 홍보 글만 나올 뿐 사적인 글은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두 단락이 문진이 썼다가 버린 소설의 일부분과 95% 이상 일치했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고 목 아래 가슴 부분이 콱 막힌 기분이 들어 아이스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디에 이 상황을 알리고, 호소해야 할지, 저 당선자가 내 글을 표절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섣불리 나섰다가 영원히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건 아닐지, 이 판에서 영원히 추락하면 어쩌나 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르, 주제, 소재의 유사성 정도가 아니라 문장 구성과 문체 특히 엄마의 메시지 부분 중 오타가 문자를 표현하는 부분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면서 읽어봐도 몇 번이고 썼다가 풀리지 않아서 [처음만 있고 마지막은 없는] 폴더에 넣어놨던 글이었다.


차마 완성하지 못한 글의 일부였다. 따라서 합평을 한 적도 없으니, 사람으로부터 유출됐을 확률은 0%. 웹 드라이브에만 있던 글이라 도대체 어떤 경로로 유출이 됐을까 혼란스러웠다. 만약 드라이브가 해킹됐다면 글뿐만 아니라 사진과 온갖 파일들도…끔찍하다. 아니면 이 모든 일이 거대한 깜짝 카메라일지 상상하다가 갑자기 어떤 장면이 탁하고 스쳤다.


지난가을 새로 열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AI 사이트였다. 이제는 AI가 소설을 쓰는 시대라고 광고하며 초기 가입자들에게 글자 수 제한 없이 3개월의 이용권을 제공해 줬던 그 사이트. 포털 사이트 아이디로 연동하며 가입하는데도 체크박스가 많아서 ‘뭐가 이렇게 많아’ 읊조리면서 ‘전체동의’를 체크했던 내가 떠올랐다.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한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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