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문진 Apr 03. 2024

글쓰기 에스테틱

문진은 혹시나 여기가 사이비 종교는 아닐까, 오장육부가 튼튼한 본인의 장기가 다 팔려 가는 건 아닐까? 최악의 수를 상상하면서 글쓰기 에스테틱이라는 곳 문 앞에서 동생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다. [도착. 혹시 한 시간 뒤에도 연락 없으면 신고해 줘라. 들어간다. 떨림] 문을 열고 들어간 내부의 첫인상은 보통의 피부 관리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시원한 편백 향이 은은하게 났고, 적당한 습도 덕분에 쾌적하게 느껴졌다. 본인을 매니저라고 소개한 사람과 간단한 상담 후에 프로그램 창시자인 원장과 면담을 통해 쓰기 시술을 선택한다고 했다. 상담 내용을 토대로 시술 추천을 해준다는데 도통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 이곳에 온 문진처럼 어색하게 보였다. 

문진은 원장실 문을 여는 짧은 순간에 소복이라도 입은 사람이 기다리는 건 아닐까, 혹은 돈부터 내라고 하는 건 아닐지, 그것도 아니라면 신종 범죄에 휘말리나 했다. 염려와 달리 편안한 셔츠에 포근한 카디건을 걸쳐 입은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온화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원장은 문진의 문진표를 쭉 읽어본 뒤에 질문하기 시작했다.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꼭 매일 밤, 잠들기 위해 찾아보던 ASMR 영상 같다고 문진은 생각했다. 


“얼굴에 열이 많으시고, 잠도 깊이 못 주무시는 편이죠? 남의 눈치를 많이 보시는 편이신가요? 운동량도 많지는 않으시고, 기질도 꽤 예민하신 듯하고. 일단 오늘은 처음 방문하신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시술 1회권을 추천해 드릴게요. 한 번 해보시고 다회권으로 등록하실지 마실지 결정하셔도 좋아요.” 

코끝으로 관통하는 바람이 심장까지 시리게 하는 날씨임에도 문진이 집으로부터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인천까지 간 이유는 혼자만 쓰는 블로그에 달린 댓글 하나 때문이었다. 


[비밀댓글입니다] 안녕하세요. ㅇㅇ 글쓰기 에스테틱입니다. 문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저희 글쓰기 에스테틱에서는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방법, 선잠 상태에서 쓰기, 호흡 잘하기, 졸면서 잠 참기, 숨어있는 뇌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 찾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쓰기 프로그램(시술)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카카오톡 채널 친구 추가 후 예약해 주세요. 


문진은 원장실에서 나와 모든 전자기기를 포함한 짐을 사물함에 넣은 뒤 관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실은 모두 1인실인 듯 보였다. 예상했던 책상과 의자가 아닌 실제 피부관리실처럼 침대가 있었고, 따뜻한 전기장판이 켜져 있었다.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기다리니 곧 노곤해졌다. 침대에는 노트와 펜이 놓여 있었다. 몸은 녹아내리지만, 문진은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다. 이내 관리실의 문인 커튼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또 다른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문진님 맞으시죠? 오늘 첫 방문이고, 스탠다드 시술 1회권 두피 부분 맞으실까요?” "으음..네.." 문진은 누워서 약간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관리사의 말은 마치 입력한 문장을 순서대로 내뱉는 것이 중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배 위에 핫팩 올려드릴게요. 편백 스프레이를 공중에 뿌릴 텐데 얼굴에 떨어지면 조금 차가우실 수도 있으세요.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곧 시술 준비해 드릴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조용하게 속삭임만 들리는 공간이었다. 다음엔 어떤 게 올지 모르는 상태로 하염없이 기다리니 의지와 상관없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자면 안 된다고 외쳤지만, 곧 평소에 생각해 보지 않았던 장면들이 떠다니면서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는 듯했다. 완전히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경계선에서 떠오르는 걸 잊지 않기 위해 문진은 속으로 되뇌는 연습을 했다. 곧이어 다시 커튼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감은 눈앞으로 보라색과 회색빛이 섞인 색이 보이더니 지지직 화면 조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냥 두면 잊어버릴까 결국 손을 뻗어 더듬더듬 노트를 찾았다. 눈을 다 뜨지 못한 채로 얼른 첫 문장을 적었다.


오월의 밤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