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문진 Apr 03. 2024

5월 23일

오월의 밤이었다. 오월부터 시작되는 여름밤에는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있다. 그래서 그 애를 실제로 처음 본 순간 나는 그 애라서였는지 계절 탓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전날 비가 많이 쏟아져서, 나는 내심 우리가 만나기로 한 다음 날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어쩌나. 기후 변화로 이른 여름 장마가 시작된 건지 열심히 일기 예보를 찾아보기도 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몸을 실으니 흔들리는 리듬에 심장도 계속 일렁여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가져온 책은 가벼운 시집이었다. 책 속에 박힌 글자들은 전혀 가볍지 않고 촘촘한 밀도로 농축되어 있다. 떨리는 와중에 새삼스럽게 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 전부 오기 전에

생각한다

지나간 여름에 대해


이제 지나갔다고


여름을 잘 아는 사람들에겐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다


열린 문틈을 보며

무엇을 견뎌야 했는지


땀방울이 바닥을 뚫거나

햇볕이 정수리로 내리쬐거나


여름은 사라진 적 없이

여름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장마에 떠내려간 모자처럼

이제 다 끝났다는 얼굴들


얼음이 녹기 전에

딱딱 깨물었다


이번 여름은 정말 미쳤어

여름이 미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날벌레가 작게 찢어졌다

가로로 세로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묻고 또 물었다

_안미옥, 「유월」(『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시를 좋아하려던 참이었고, 이 시를 발견하고 여름 대신 그 애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기도 했다. 웃음이 나는듯하다가 울음이 날 것도 같았다.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났다. 그러니까 화면 너머로만 있던 존재에서 실존한다는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각자 공연을 본 뒤 신사 목련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날 본 공연이 어떤 내용으로 흘러갔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는다. 그 애보다 조금 일찍 공원에 도착했고 5분쯤 지났을까, 검은색 반소매 피케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그 애가 천천히 걸어왔다. 하얗고, 단정하네. 그게 내가 느낀 첫인상이었다. 목련은 이미 진 시기였는데, 목련을 떠올렸던 것도 같다.


목련은 하얗고 커다랗고 아름답지만 질 때는 얼룩덜룩 아프게 진다. 여름은 뜨거운 만큼 타오를 수 있는 것. 나는 안다. 언젠가 없어질 수도 있을 이 마음을. 그래서 한철처럼 느껴지는 이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애와 나는 각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한 책을 교환하고 짧게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내가 배고프면 먹으려던 초코바 하나를 건넸다. “이거 네가 먹으려던 거 아냐? 나 안 줘도 되는데”라며 다소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다지 상처받지 않았다. 그동안 온라인으로 나눈 대화 덕분이겠지. 그 애의 표현에서 얼마나 많은 배려가 정제되어 있는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 애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짧은 시간이었고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우리는 있을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 애가 먼저 떠났고, 나는 온몸의 열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이 다리가 후들후들했다. 5월 23일 우리가 실제로 처음 마주한 날이었다. 화면 속에서만 있던 네가 내 앞으로.

이전 11화 글쓰기 에스테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