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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문진 Apr 03. 2024

집에 가야지

“아까 드셨잖아요. 여기 약 봉투 보이죠?. 드셨어. 드셨어.” 할머니는 자꾸 내게 “내가 약을 먹었나?”하고 물었다. 물음이 한 번, 두 번을 넘어서 매일 하루에 열 번씩 물을 지경이 됐을 때 나는 이제 누가 약을 먹어야 하는 상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침 열 시쯤 나가서 오후 네 시쯤 돌아오던 경로당이 문을 닫은 후로 할머니랑 하루를 보내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침 11시 30분이면 점심밥을 준비했다. 오래돼서 불편하다며 틀니를 뺀 채로 식탁에 앉아 잇몸으로 밥을 먹는 할머니를 마주하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내 식욕은 점점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배가 고프지 않다는 말로 먼저 식사를 차려드리고 나는 따로 먹었다. 알 수 없는 죄책감 같은 것이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망치를 내리치듯 윗집 사람이 내 머리 위를 걷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에 따라 내 심장도 쿵쾅거렸고 밤이면 눈만 감고 누워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쯤 할머니는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게 되셨고, 만세를 불러야 할지 아쉬워해야 하는지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약간 불편한 마음이 있고 조금 후련한 것 같았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귀에서 환청처럼 들리던 “내가 약을 먹었던가?”라고 묻는 말이 사라진 공간은 적막만 가득했다.


요양원으로 가기 전, 할머니는 집에 그토록 오래 있으면서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았다. 밥 시간이 되면 식사를 하고 소파에 잠깐 앉아있다가 다시 방에 들어가 왼쪽 벽을 보고 누워서 뭔가를 중얼거리셨다. 혼잣말 같기도 하고, 대화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했다. ‘심심하지도 않으신가’ 그러다 아빠와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엄마가 저녁밥을 준비하는 동안 아빠와 약간의 대화를 하셨고, 식사가 끝나면 곧장 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떤 날은 그르릉 코를 골면서 낮잠에 빠지기도 했는데 “할머니 낮잠 자면 밤에 잠 못 자요”하고 말하면 “예잇! 내가 언제 잠을 잤다고 그래. 평생 낮잠을 자 본 적이 없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처음엔 아니라고 방금 주무시고 일어났다고 말했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 했다. 집에 있는 동안은 뱉어지지 않은 가래가 끼인 것처럼 목과 가슴이 갑갑했다.


부모님은 주말마다 할머니를 보러 갔고, 나는 한 달에 한 번쯤 쫓아갔다. 할머니는 갈 때마다 “얼른 집에 가야지”라고 하셨고, 그럴 때마다 요양사 선생님들 “아이고 우리 어머니 자꾸 어딜 가신다 그래. 여기가 집이에요” 하셨다. 요양원 방문을 자주 쫓아가지 않았던 이유는 할머니를 거기 두고 돌아올 때마다 멀미하듯 속이 매스꺼워지는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세탁기를 돌릴 때마다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속옷만큼은 꼭 손빨래를 하셨는데 혼자서 빨래할 때면 힘을 주느라 내는 끙끙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방에 있다가도 세탁실에서 소리가 나서 가보면 손이 퉁퉁 불은 할머니가 물기가 뚝뚝 흐르는 팬티를 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 제발 그냥 내놔요. 추운데 진짜! 세탁기가 다 한다니까요” 소리쳤고 할머니는 “예끼 이년아. 내가 아무리 힘을 못 써도 내 팬티는 내가 빤다. 망신스럽게!” 하고 되받아쳤다.


원래 할머니가 살던 곳은 요양원이 있는 S시도 아니었고, 잠깐 같이 살았던 우리 집이 있는 J시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서울에서 몇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P시에서 몇십 년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태어난 곳이 P시는 아니었다. 요양원에 갔다가 집으로 갈 때면 할머니는 “이제 집에 가야지. 나도 가야지. 집으로 가자”라고 하셨지만, 할머니가 말하는 집이 어디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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