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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문진 Apr 03. 2024

타이베이 필름하우스

“내가 너 뒷모습을 찍어도 될까? 인화한 사진은 메일로 보내줄게”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내게 한 남자가 와서 갑자기 말을 걸었다. 동양인 남자, 눈은 동글동글, 유창한 영어, 그리고 나쁘지 않은 목소리. 키는 177cm쯤 될까. 목에는 필름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 나는 알겠다고 말했고 찜찜하기도 하고 긴장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 내 뒷모습을 집중해서 본다는 사실이 꽤 생경했기 때문에. 나는 내 일회용 카메라로 내 정면 사진도 부탁했고, 그는 괜찮다면 본인이 이곳을 소개해주겠다고 해서 같이 타이베이 필름하우스를 둘러보게 되었다. 흰 건물과 짙은 초록색 나무와 풀의 대비가 아름다운, 아기자기한 소품샵과 예술 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상영관, 그리고 카페가 함께 있는 크지 않은 공간이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대만인이지만 영어 이름은 조나단이라고 말한 그는 자기가 그동안 찍어온 사진을 보여줬다. 처음엔 ‘뒷모습 페티쉬가 있는 변태는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그럴 만도 한 점이 그가 보여준 사진 속 피사체는 모두 누군가의 뒷모습 또는 뒤통수였기 때문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꽤 오랜 시간 찍어온 듯 보였다. 혼자 여행을 온 이방인 여자인 나로서는 뒷모습만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는, 대만인이지만 영어 이름을 쓰는 이 남자를 의심하고 경계하기에 충분했다. 저 사진 속 사람들 모두에게 촬영 허락은 받았을까 아니면 아는 이들의 모습일까 혹 그것도 아니라면 진짜 변태는 아닐까. 나는 물어볼까 말까 속으로 100번 정도 생각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뒷모습만 찍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에드워드 양 감독 알아?

-알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감독. 허우샤오셴 감독을 아는데 에드워드 양을 모를 리가

-그러면 저 영화도 봤어?

-아니

-다른 영화도 아는 거 있어?

-<타이페이 스토리>. 그건 몇 년 전에 극장에서 봤어. 한국에서 재개봉했었거든

-혹시 <하나 그리고 둘>은 알아?

-알아. 그거 포스터가 예뻐서. 그런데 그 영화도 아직. 이번 여행 때 보려고 다운받아 오기는 했어


하지만 매일 2만 5천 보씩 걷느라 숙소로 돌아가면 곯아떨어져서 영화를 볼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조나단은 내 물음에 명쾌한 대답 대신 또 다른 물음으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대만 영화를 좋아해서 이곳에 왔다고 말한 게 무색하게 막상 타이베이 필름하우스를 만든 허우샤오셴 감독의 영화도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도 딱히 본 게 없다는 사실이 뻘쭘해서 자꾸 변명하듯 대답했다. 모르는 것들과 아직 하지 않은 것들에 자주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상한 소유욕이었다. 조나단은 여행이 끝나기 전에 꼭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고 그러면 본인이 뒷모습만 찍는 이유도 알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끝까지 쉽게 대답해주지 않는 그에게 살짝 짜증이 났지만, 역설적으로 더 궁금해지기는 했다. SNS를 하지 않아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준다는 것도 신기했다. 사진기도 그렇고 여러모로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다 싶었다.


그와 헤어지고서 곧장 숙소로 돌아가 노트북을 챙겨서 근처에 있는 ‘時光(시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로 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치즈케이크를 주문했고 영화를 재생했다.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궁금한 점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돌아다닐 수 없을 것 같은 충동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빨리 감기를 하며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는 세 시간의 러닝타임, 느릿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정적인 장면들, 명과 암이 분명한 필름의 질감으로 가득 찬 영화였다. 중반부를 넘길즈음 소름이 돋았다. 비슷한 것 같아보였는데 자세히 보다보니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 주인공 NJ와 처남 그리고 NJ의 아들 양양이 나눈 대화 장면에서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NJ의 처남: 내 뒤통수네. 양양 이런 건 뭐하러 찍었니

양양: 삼촌은 뒤를 못 보니까 내가 찍었어요

NJ: 아, 그런 이유였어!


영화는 돌아가신 할머니 앞에서 어린 양양이 일기장을 읽어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마지막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조나단이 SNS 주소 대신 알려준 메일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나는 바로 받는 사람 칸에 그의 주소를 입력하고 메일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메일 주소는 그의 중국어 이름이었다.


보낸 사람: 나

받는 사람: yangyangfil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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