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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문진 Apr 03. 2024

오늘의 동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어지고 낮이 제일 짧다는 오늘은 동지(冬至)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글을 먼저 써야지 생각하지만, 매일 지키는 게 쉽지는 않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커피가 꼭 필요한데, 집에서 작업을 하는 날이면 조금 걸어서 용량이 많은 1,500원짜리 커피를 살지, 아니면 집 앞 편의점에서 1,000원짜리 커피를 살지 종종 고민한다. 오늘은 한파주의보도 내려졌으니 도보 1분인 편의점 커피를 택하기로 한다. 엄동설한이지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작은 텀블러를 하나 챙겨서 집을 나섰다.


샌드위치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원했던 게 없어 하는 수 없이 대파 크림 샌드위치를 하나 고르고 카운터에 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텀블러에 받아 갈게요.”라고 말했다. 총 결제 금액은 4,000원. 300원의 텀블러 할인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이 얇은 샌드위치도 생각보다 가격이 있구나 했다. 커피 머신 앞에서 커피를 뽑으려고 보니 ‘기계를 세척해주세요’라는 문구가 떠 있었는데 이것도 차마 말하지 못한 채 그대로 아메리카노 버튼을 눌렀다. 편의점 아저씨는 바스락 소리를 내며 카운터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올려놓고 내게 가져가시라고 말했다. 버터 과자였다.


“텀블러 그런 거에 관심 있으신가 봐요?”

내게 말을 건 게 분명했는데 마치 게임 속 *NPC가 갑자기 말을 건 기분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네? 아… 아무래도 쓸 수 있는 상황에선 일회용품을 안 쓰려고 해요.”

“맞아요. 중요하죠. 그런데 정부는 다시 카페 내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풀어버리니…….”

나는 “그러게요.”라며 맞장구 칠 수 밖에 없었고 혹시나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싶어 염려했다. 아침부터 낯선 사람과 그런 류의 이야기는 조금 피로하니까. 그러나 대화 주제는 오늘의 추위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오늘 날씨가 정말 춥죠. 그래도 추우니까 이제야 겨울 같아서 다행이에요.”

“맞아요. 최근에 너무 따뜻해서 겨울이 맞나 싶긴 하더라고요.”

“한강이 언 거 본 적 있어요? 옛날에는요. 한강이 아주 다 꽁꽁 얼었어요. 요즘은 보기 힘든 것 같아. 진짜 옛날 같지가 않아요. 요즘 사람들은 한강 어는 거 볼 일이 없을 거야.”

“맞아요. 보기 힘든 것 같아요. 저도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닌데 확실히 예전이랑은 다른 것 같아요.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들이 지구에 나타나고 있는 게 느껴져요.”

“저는 71년생인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선생님은 몇 년생이실까요?”

“아, 저는 90년생이에요.”

“에이 그러면 아직 한창이죠. 어리죠.”

“아, 물론 맞기는 하는데… 그래도 이제 30대 중반이니까…”


조금씩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긴 하지만 품 안에 들고 있는 커피가 식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간단하게 편의점식 브런치를 하고 글을 쓰려던 내 계획이 오늘의 날씨처럼 얼어가고 있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카운터 옆 벽면에 걸린 시계를 흘깃 쳐다봤다.


우리는 20분 동안 정부의 일회용 정책문제, 건강보험 문제, 노령화 사회, 연금보험을 내야 하는데 과연 나중에 돌려 받을 수 있나, 연금보험은 국민의 의무가 맞나, 지구 온난화, 환경 오염 문제 등의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주로 뒷말을 반복하는 리액션을 선보이는 식에 가깝긴 했지만.


“아니 그런데 어떻게 젊으신 분이 이렇게 관심이 많고 잘 아세요? 또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어떤 일을 하시나요?”라고 물으셔서 3초 정도 멈칫했다. 언제부턴가, 그러니까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주춤하게 되는 순간을 자주 마주한다. “저 글 쓰는 일 하고 있어요.”라고 뭉뚱그려 대답하면 대화가 끝날 줄 알았는데 편의점 아저씨의 눈이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쉽게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손님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을 수가 있지.


“어, 그렇다면 Editor세요? Writer세요?” 우아한 목소리로 또 물어오신다.

“음… (아무래도) 롸이터에 더 가깝기는 해요. 제 글을 쓰거든요. 에세이나 소설이나 등등….”하면서 어쩐지 내 목소리가 아까 이야기 할 때와는 반대로 점점 더 작아지는 듯 했다. 나만 들릴 정도의 소리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고 말하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좀 어떤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이나 직업이 돈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면, 난 어쩌면... 직업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곧이어 편의점 아저씨는 “저는 파일럿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저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와”하며 여태껏 했던 반응 중 가장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러면서 (구) 파일럿 (현) 편의점 아저씨인 (편의상 파편님이라고 부르겠음) 파편님은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쭉 일기를 써서 모아놓았다고 말하셨다. 그리고 작가와 글쓰기라는 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기 시작하면서 “저, 되게 잘 알고있죠? 저 많이 알고있죠?”라며 마치 어린아이가 칭찬을 바라는 듯한 얼굴로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저 오지 않는 손님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바라는 중이었고, 식어버린 커피보다 슬리퍼를 신은 내 맨발이 더 걱정 되기 시작했다. 파편님은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했다.


“작가가 되려면 어떤 게 가장 필요한 것 같아요?”

“음,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엉덩력(力)이에요. 엉덩이로 버티는 힘. 그게 가장 필요한 것 같아요.”

“와, 와! 저 최근에 본 드라마에서 비슷한 대사가 나왔어요. 지금 제목이 생각 안 나는데 거기서도 그런 비슷한 말을 하더라고요. 글은 버티고 쓰는 게 중요하다면서!”


나는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웃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대놓고 시계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때마침 종소리가 울리며 편의점 문이 열렸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애석하게도 손님이 아닌 파편님 다음 타임에 교대할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조용히 카운터 옆으로 스윽 오며 나를 한 번 보더니 눈인사를 나누고 다시 파편님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점장님, 나 라이터 좀…….”


부럽다. 나도 롸이터가 필요할 때 ‘점장님 나 롸이터 좀’하고 빌릴 수 있는 점장님과 빌려 쓸 수 있는 롸이터가 있으면 좋을 텐데. 곧이어 이번엔 진짜 손님이 담배를 사러 들어왔고 덕분에 자연스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파편님은 쓰는 일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책을 내는 일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의 일기 속 이야기가 당장은 궁금하지 않았다. 당장이라고 쓴 이유는, 미래에는 궁금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지망생끼리의 한탄은 지겨운 부분이 있었고, 한편으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내 안에 들일 여유가 없기도 했다. 사실은 스몰토크의 귀재인 내가 구태여 더 묻지 않고 대화를 잇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망 선고 같은 일인데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현재 파편님의 이야기에 설렘을 느낄 여력이 없는 상태처럼 보였다. 내게는 지금 당장 몇 주 뒤에 갚아야 할 카드값을 구하는 일이 더 시급했고, 전 날 올린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조회수가 더 궁금했고, 앞으로 연재할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가 더 중요했다.


인사를 하고 나서는데 파편님은 “다음에 또 데이트 해요~!”라고 웃으면서 소리쳤고, 나는 살짝 미소를 띠고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가족들이 있는 카카오톡 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나 이제 아침에 편의점 못 갈듯. 건너편 씨유 가야겠다.]


집에 도착하니 약간의 피로가 몰려왔다. 그런데 이상하지. 분명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고, 집에 빨리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한동안 혼자 있느라 말할 상대가 없었던 내게 파편님이 오늘의 동지(同志)였던 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드는 건 왜일까.




*NPC(Non-Player Character):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 플레이어에게 퀘스트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도우미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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