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문진 Apr 03. 2024

나의 엑스

“그래, 잘 지내고.”


정명석은 4년 만에 온 이은아의 연락을 그렇게 거절했다. 화창한 가을 날씨였다. 두 사람은 스무 살에 처음 만나 5년 동안 연애했고, 헤어짐 역시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먼저 이별을 얘기했던 것도 이은아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연락이 올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헤어진 연인이 함께 방송에 출연해서 새로운 사랑을 찾는 프로그램에 나가는 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했다. 정명석은 도대체 이은아의 제안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쓸데없이 이런저런 기사를 무의미하게 클릭하다가 싸이월드가 복구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싸이월드에 접속했다. ‘싸이월드의 부활을 응원하며 기다려주신 많은 회원분 덕분에 여러분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 180억 장, 동영상 1억 5천만 개는 다 복구되었답니다.’


이은아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정명석은 그 공간에 열심히 사진과 일기를 비공개로 남겼었다. 그녀의 생일이 포함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로그인 버튼을 눌렀더니 그 시절이 그대로 복구되었다. 마지막 일기는 헤어진 후 힘들어하던 어느 날에 멈춰있었다. 까마득한 과거 같았다. 몇 년 사이 성숙해졌다고 느꼈다. 그 시절의 일기들은 몇 개의 짧은 단어 혹은 길지 않은 문장으로 쓰여있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당시의 공기까지 생생히 기억나는 듯했다.


*


이은아는 정명석보다 세 살이 많았다.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데이트에서 주로 돈을 쓰는 사람은 대부분 이은아였다. 이은아가 대부분 밥을 사면 한 번씩 정명석이 커피를 사고, 이은아가 자주 영화를 예매하면 어쩌다 한 번씩 정명석이 팝콘을 사는 식이었다. 잦은 데이트를 하기엔 돈이 없었고, 그렇다고 만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때였다.


크리스마스와 동시에 기념일을 앞두고 있던 스무 살이었다. 가지고 있는 잔고로는 백화점 립스틱 하나도 선물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특별한 데이트 계획을 세울 여력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면서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포기하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정명석은 생각했다.


아직도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그런 욕망 때문에 당시 정명석은 여자들만 가입할 수 있는 제법 큰 규모의 커뮤니티에 거짓 정보로 가입해 매일 올라오는 글을 읽으며 소소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9년 전, 20대 초중반의 여자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화장법, 요일별 데이트 코디법, 화장품 추천 및 데이트 코스 추천 등의 팁들이었다. 익명으로 된 고민 게시판에는 연애 상담 글이 매일 끊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가입한 거라 위안 삼던 정명석도 나중에는 이 행위가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끊을 수 없는 지경이 됐는데 덕분에 톡톡히 이득을 얻은 일도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자취방에 누워 그날도 어김없이 커뮤니티 눈팅을 하던 중이었다. 고민 게시판에 곧 삭제 예정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서 재빨리 클릭했더니, 크리스마스 기념 레스토랑 신메뉴 출시 이벤트에 관한 내용이었다. 영화관에서 특정 영화 상영 전에 나오는 광고 중 하나에서 좌석번호를 추첨하는데 해당 좌석의 영화 티켓을 가져오면 1인당 4만 원 상당의 스테이크와 샐러드바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익명의 글쓴이는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추첨 번호 매일 바뀐다고 말하는데 믿지 마. 랜덤 X. 번호 같음. 원하는 사람 비공개 댓글 달면 선착순 5명만 알려줌.’


누구보다 빠르게 댓글을 달았기에 든든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모처럼 자신 있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겠다고 떵떵거렸다. 데이트 전 잠시 접속한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그 글이 인기 글로 화제가 되고 있었고, 삭제한다고 예고했던 글의 댓글은 어느새 600개가 넘어갔기에 정명석은 유출된 정보로 인해 모든 게 없던 일이 될까 봐 초조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당첨 번호가 부디 바뀌지 않기를 바라면서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를 보러 갔다.


상영관 안 불이 꺼지고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진짜 이상하네. 영화도 보여준다고 그러고, 밥도 사겠다고 그러고. 나 몰래 복권이라도 된 거야?” 이은아는 웃으면서 장난을 걸었고 그러는 순간에도 정명석은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그녀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세 번째 광고가 지나가고 드디어 네 번째 광고에서 눈사람들이 나와 번호를 추첨했다. 사전에 구매해놓은 티켓의 좌석은 익명의 글쓴이가 알려준 대로 정말 당첨 번호에 해당했다. “아쉽다. 우리는 안 됐어.” 이은아는 말했지만, 그때부터 정명석은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였다. 이제는 어떻게 매장에 가서 티 나지 않게 계산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연이어 들렸다. 정명석은 다시 한번 출연하지 않기로 한 일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찌질한 과거가 드러난다면 순식간에 각종 SNS와 포털 사이트에서 엄청난 화젯거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왜 하필 본인이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정명석은 싸이월드에서 회원 탈퇴 버튼을 찾았다.

이전 04화 반성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