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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문진 Apr 03. 2024

내일의 작가들 시즌1 : 여름

남은 시간은 28분 남짓.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다들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저들이 나를 볼 때도 그렇게 보이려나? 합숙 이틀 차, 나는 3주 전, 이 출연을 제안한 나에게 돌아가서 멱살을 잡고 말리고 싶은 심정이 됐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고생과 수치를 사서 겪고 있는 걸까. 내 머릿속에 ‘장미’라는 키워드로 떠오르는 글이라고는 [장: 장난하냐? 진짜 미:미치겠다 진짜 졸라 안 써짐’ 뿐이었다. 뭐라도 나올까 싶어서 끄적여봤지만, 아직 긴장이 덜 풀린 건지, 정말 내 실력의 한계인지 다 뻔한 아이디어만 튀어나올 뿐이었다.


*


[안녕하세요, 작가님. TEX 방송사에서 새 프로그램을 제작할 예정인데 공식적으로 등단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글을 쓰시는 작가님들을 모집 중입니다. 작가님이 저희 프로그램 의도와 잘 맞을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촬영은 3주 뒤에 시작합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편하게 답장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메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인스타그램 디엠으로 받은 메시지 중 절반은 쓸데없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처음엔 또 누가 이런 장난을 할까 싶었는데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계정을 들어가 보니 유령 계정이나 사칭 계정이 아니었고 그 흔한 부업 계정도 아니었다. 심지어 파란 딱지가 붙은 몇몇 연예인도 그 사람을 팔로잉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는데 등단이 아닌 방송을 통해서 먼저 이뤄지게되다니. 미리보기로 메시지를 읽었지만 바로 답장을 하면 너무 이런 기회를 기다린 사람처럼 보일까봐 다음 날 참여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분명히 사전 미팅 땐 경쟁하는 느낌보다 서로 화합해서 작품을 만들어 가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이곳에 들어와 보니 슈퍼스타K도 아니고, 글 쓰는 사람들끼리 경쟁하게 해서 순위를 부여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떤 무식한 사람 머리에서 나온 기획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수락한 건 또 결국 나니까. 그런 놈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언가를 향한 갈망에서 비롯된 조급함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비굴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프로그램이 완전히 망하거나 아니면 노이즈마케팅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시청률이 나오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예술의 영역과 감각을 평가한다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래나 춤의 경우 그래도 심사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조건들이 있지않나? 예를 들면 동작을 얼마만큼 깔끔하게 소화하는지 혹은 기존 안무를 습득하는 속도 같은 건 제한된 시간 안에 소위 '방송용'그림이 나온다. 노래의 경우도 최소한 음정이나 박자 같은 것으로 기본 평가는 가능하다. 그동안의 그런 종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여러 방송사에서 같은 포맷으로 우후죽순 쏟아져 나와도 다 잘 된 건 이유가 있다. 하지만 글 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바이벌 오디션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


그동안 이런류의 프로그램을 볼 수 없었던 건, 그러니까 화제거리라면 무조건 달려드는 방송국 사람들이 그동안 시도하지 않은 이유가 분명 있지 않을까? 글의 경우는 맞춤법, 문장의 기본 배치 정도 말고는 상당 부분이 취향의 영역에서 좌우된다고 생각해왔으며 지금도 그 생각은 그대로다. 십만 부씩 팔린 베스트셀러가 제 아무리 문체가 독특하고 문장이 깔끔하다고 한들 개인 독자의 어떤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단 한페이지를 넘기기도 어렵다. 내 주위의 비등단 작가들이 말하는 등단이 쉽지 않은 이유도 심사위원의 취향차이때문이라고 말한다. 본인이 제출한 글이 결국 어떤 타이밍에 어느 심사위원의 눈에 들어오는지가 합격의 당락을 결정짓는데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여기 모인 나 같은 사람들의 글을 심사하려고 온 패널들은 총 6명이나 된다. 출간 이력이 있는 잘 나가는 작사가와 싱어송라이터,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는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에세이스트 방송인과 서점을 운영하는 영화감독이다. 이 프로그램의 최종 목적은 시즌별로 계절에 맞는 키워드로 여러 형태의 글을 쓴 최후 3인의 작품을 토대로 노래, 영화, 그리고 책을 만든다고 했다. (망할 게 뻔히 보이는 프로그램을 다음 시즌까지 생각하다니)


아무튼 멍청한 기획인듯 하면서도 결국 사람을 홀리게 하는 방송국 놈들의 실험 대상 1호가 내가 됐다는 것이 화가 나면서도 상반된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참에 주목은 제대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일까.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방송 전 보다 몇 배는 많아질테고, 그러면 원고 청탁도 자주 들어오지 않을까 싶었다. 방송 한 번으로 바로 인플루언서가 되는 소개팅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득보다는 실이 커보이니까 부담스러운 면도 있어서 원하지 않았다. 물론, 섭외가 들어온 적은 없다. 적당히 고상하고 적당히 솔직한 모습으로 이목을 끌고 싶은 욕구가 컸고, 이런 감정을 품는 자체로 너절한 것도 같았지만 이왕이면 최선을 다해서 나름대로 작가라는 품위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촬영 시작 전에 인스타그램 피드도 깨끗하게 정리했다.)


*


카메라맨이 나를 향해 온다. 아마 쓰고 있는 글을 클로즈업하려는 거겠지. 작가들의 글 쓰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게 재미없고 지루할텐데. 그들이 원하는 쓸만한 컷이 극소수라도 있을까? 악마의 편집도 못 할 것 같다. 재미없고 지루한 장면을 몇 개만 예시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밖으로 뛰쳐나가거나 쓰던 걸 냅다 다 지워버리고 엎드리는

-글은 쓰지 않고 온종일 빈둥거리며 핸드폰으로 퍼즐맞추기나 캔디크러쉬 게임만 하면서 가끔씩 탄식만 하는

-한 문장 쓰고 편안한 자세를 찾는다며 명상을 하다 잠꼬대를 하는

-커피만 미친 사람처럼 들이키거나 밖에서 하염없이 산책만 하는

-하루종일 미간을 찌푸리고 있거나 창문 밖을 멍하니 응시하다 여러 권의 책만 뒤적거리는

-샤워를 하러 들어가서 30분 넘게 나오지 않고 물소리만 들리는

-갑자기 주변을 결벽증 환자처럼 청소하는


뭐 이런 장면들의 반복이니 과연 그들이 좋아하는 자극적인 장면을 얻을 수 있으려나 싶다. 책상에 앉자마자 일필휘지하는 작가는 정말 드물다.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라이트를 보여주는 예고편은 어떤 식으로 만들려나... 여기까지 생각이 다 다르니 갑자기 이런 사람들을 불러다 놓은 제작진이 애잔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프로그램 기획안을 수락한 윗사람이 어쩌면 제일 용기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 코가 석자인 순간에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카메라맨과 라인맨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일기장에도 쓰지 않을 법한 이행시를 아무도 못 알아보게 아주 새까맣게 칠했다. 그리고 카메라가 내 앞으로 오기 전에 아무 문장이나 일단 떠오른 걸 재빨리 휘갈겨 썼다. '초여름의 밤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기 쉬운 계절이다.' 나한테는 첫 문장으로 쓸 만한 것들만 모아놓는 첫 문장 노트가 있는데 그게 이런 순간에 쓸모있을 줄은 몰랐다. 이제는 다음 문장과 또 그 다음 문장이 나를 이 글의 마지막으로 데려가주기를 간절히 빌고 또 바랄뿐이다. 혹시나해서 말하지만 끝 문장 노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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