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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문진 Apr 03. 2024

604호와 603호 사이의 밤

믿고 싶지 않았다. 밤 12시 37분, 간절하게 빌었던, 마주치지 않고 싶었던 것이 기어코 나타나 버렸다. 설마 했는데. 아닐 거라 믿었는데. 막 씻고 나온 참이라 안경이 없어 방 안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음에도 단 하나만이 마치 조명을 받는 것처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탁자, 탁자 위의 호텔 전화기, 호텔 전화기 앞에 내 안경, 그리고 바로 그 위 벽면에 붙어있는, 차르르 반들거리는 구릿빛 피부의 소유자,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바퀴벌레였다. 인기척을 느껴서인지 그 녀석은 원래 있던 장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 말고 내 다리를 말하는 거다) 방금 씻어서 뽀송한 등 뒤가 땀줄기로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 녀석이 조금 더 옆으로 움직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도 모르게 내뱉은 괴성에 옆 방까지 들린 건 아닐지 걱정하다 차라리 더 크게 소리를 질러서 누군가 내 방으로 와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녀석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잠자코 붙어있었다. 혹시라도 나에게 날아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잠옷 위로 샤워가운을 걸쳤다. 1층 로비에 있는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탁자까지 갈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대만으로 출장 오기 전 내가 가장 염려했던 상황이 바로 이 장면이었다. 숨 막히는 더위도 온몸을 휘감는 끈적이는 습도도 길거리의 향신료 냄새도 귀찮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모두 다 괜찮았다. 교환학생까지 다녀온 경험이 있는 내가 끝끝내 적응하지 못했던 단 하나. 바퀴벌레였다. 손가락 두 마디는 거뜬히 넘는 크기, 재수 없게 긴 더듬이,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 심지어 날아다니기까지 하는 오버 스펙의 미친 녀석을 작은 방 안에서 (혼자 있을 때) 조우하는 건 꿈속에서 자주 팬티만 입고 집 밖으로 나가는 일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지이잉하는 진동 소리에 다시 한번 더 소리를 지르며 (도저히 조용히 움직일 수가 없다) 커피포트 옆에 충전해놓던 핸드폰을 가지고 잽싸게 다시 화장실로 들어왔다. 과연 초인적인 빠르기였다. 지인샘, 주무세요? 늦은 시간에 예의 아닌 거 아는데 잠깐 나갔다 오는 길에 선생님 방 쪽에서 큰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요. 무슨 일 있으신 건지 혹시나 해서 연락드렸어요. 아니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앞방에 있는 윤환선생님의 메시지였다. 세상에. 주여. 감사합니다. 이제는 믿지 않는 신에게 저절로 감사 기도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살았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윤환샘, 지금 제 방에 바퀴벌레가 나타나서 화장실에 숨었는데요. 진짜 정말 죄송한데 혹시 1층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벌레 좀 잡아줄 수 있는지 아니면 남는 방이라도 있는지 대신 여쭤봐 주실 수 있으세요? 3분쯤 뒤에 답장이 왔다. 남은 방은 없고 직원도 바퀴벌레는 못 잡는다는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마지막 희망은 같이 온 최연주 선생님께 방을 같이 쓸 수 있는지 묻는 거였는데 늦은 시간인지라 아무래도 이미 주무시는 듯 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윤환샘, 진짜 죄송한데요 말도 안 되는 부탁인 것도 아는데 혹시 샘 방 한구석에 조용히 있다가 해 뜨면 제 방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될까요? 도저히 이 방에는 밤새 못 있겠고 최샘은 주무시는 것 같고, 밖은 갈 데가 없고요. 뭐가 됐든 그 녀석과 둘이 같이 있는 것보단 사람이 나을 테니. 미친 척 메시지를 보냄과 동시에 갑자기 호텔 방문이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고, 윤환선생님이 서 있었다. 안도가 되기보다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는데 어째서 열어주지도 않은 방문이 저렇게 쉽게 열린걸까 생각했다. 어떻게 들어왔냐고 놀라서 물어보려는데 목소리가 목구멍 끝에 걸려서 입 밖으로 내뱉어지질 않았다.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저 사람이 윤환선생님이 맞던가? 얼굴이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문 앞에 서있는 사람은 내가 알고있는 윤환선생님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입고 있는 옷도 전혀 조화롭지 않았는데 상의는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아래는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옆에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이민가방이 놓여있었다. 대체 지금 이게 뭐야, 꿈인가?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온몸이 저 깊은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핸드폰 알림인 마림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불규칙하게 뛰었고 그러다 눈이 떠졌다. 5초간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차렸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53분이었다. "진짜 꿈이였어?" 나는 대만의 호텔방이 아닌 한쪽 자리만 쑥 꺼진 우리 집 소파 위였다. 심장박동이 이제야 제 호흡을 찾았다. 옆에 있는 노트북 화면에는 마우스 커서만 쉴 새 없이 깜빡거렸다. 원고 마감은 밤 11시 59분, 한 시간 남짓 남았는데 써놓은 건 ‘604호와 603호 사이의 밤’이라는 제목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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