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만에 참여자들이 우수수 줄어든 게 눈에 보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 두 시간은 자기를 위한 공부를 하는 미라클 모닝 온라인 모임을 신청한 은아는 나름대로 뿌듯함을 느꼈다. 연초는 무언가를 결심하기에 좋은 날이다. 출근 전, 독서와 더불어 그 시간만큼은 핸드폰 사용 횟수를 줄여야겠다고 다짐했고, 마침 그날 읽은 자기계발서에서도 일과 몰입에 관해 설명하며 수시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과 아침부터 메일을 붙잡고 확인하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에 관해 서술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SNS 애플리케이션을 지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반나절도 되지 않아 디지털 디톡스를 포기하고 결국 인스타그램을 다시 다운로드 받았다. 사무실에 있는 은아는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은 걸 인지하면서도 즉각적 자극이 오는 값싼 도파민이 필요했다. 아메리카노의 카페인만으로는 부족했다.
엄지손가락으로 빠르게 쓱쓱 친구들의 심심한 일상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이어서 상단에 있는 (24시간 뒤면 사라지는 사진인) 스토리의 컬러풀한 동그라미를 모두 흰색으로 만들고 나니 비로소 심신의 안정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인스타그램 프로필 하단 오른쪽의 사진을 두 번 톡톡 두드렸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야구선수 중에서도 타자가 자기 차례에서 헬멧을 만지고, 셔츠를 두어 번 잡아당기고, 배트를 공중에 휘두르고, 땅에 발을 세 번 구른 뒤에 침을 한 번 뱉고 투수를 쳐다보는 것 같은 루틴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어느 동작도 빼먹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흐름이었다. 루틴 후의 타자가 공을 내리침에 따라 경기의 전개가 달라지는 것처럼 손가락을 두 번 두드리면 바뀌는 화면에서는 전혀 다른 은아가 등장한다.
프로필 사진은 기본 설정, 게시글 0개, 팔로워 0명, 팔로잉 1,023명. 은아이면서 은아가 아닌 은아였다. 아무도 누구인지 모르기에 유령처럼 조용히 모두를 지켜볼 수 있는 자아, 남들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공간, 은아의 비공개 계정이었다. 비공개 계정의 팔로잉 목록은 주로 본 계정에서는 잘 팔로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요즘 뜨는 효소를 파는 인플루언서, 페이스북에서 불법으로 퍼온 유머 자료를 잔뜩 올려놓는 계정, 본 계정에서 팔로잉을 했지만 맞팔로잉을 해주지 않아 팔로잉을 끊어버린 사람들, 음악방송 무대에서 1위를 4주 연속하고 있는 아이돌 가수, 팬과 안티를 동시에 끌고 다니는 래퍼, 팔로워가 적은 나만 아는 작가, 여행 사진 작가, 영화 명대사와 캡쳐화면을 올려놓는 사람, 브랜드에서 일하는 직업인, 독서 모임 회사, 코미디언, 여행 유튜버, 친하지 않은 고등학교 동창, 꾸준히 본인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영화감독, 전 남자친구의 여자친구, 팔로워가 엄청 많은 고양이 계정 등이 있었다.
일관성 없이 뒤섞인 피드를 내리던 중에 은아 눈에 들어온 광고가 하나 있었다. 회사 근처인 혜화동에서 열리는 모임이었는데 모임 이름이 솔깃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부제: 나의 길티플레져 나누기’라는 소규모 토로대회였다. 이 광고를 올린 문화예술 커뮤니티의 모임에 참여하기엔 어딘가 괜히 위축되는 느낌이 있어서 늘 해볼까 말까 고민만 했었다. 유명하거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많은 사람들이 자주 가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모임의 상세내용을 보고 이번엔 꼭 한 번 가보기로 결심하게 됐는데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모든 참가자는 안대를 쓰고 게스트의 발언을 듣습니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하는 사람만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은아의 비공개 계정에 팔로잉 목록이 하나 더 늘었다. 커뮤니티 홈페이지에서 회원가입 후 모임 신청까지 마쳤지만 은아는 과연 본인이 그곳에 갈 수는 있을까, 가서 말을 할 수는 있을까? 아무 말도 못한다고 쫓겨나면 어떡하지 등 별 생각을 다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 새 모임날인 금요일 저녁이었다. 길거리는 사람들로 붐볐고, 붕어빵과 오뎅을 파는 포장마차도 종종 보였다. 은아는 인파를 뚫고 작은 소극장 앞에 도착해서 심호흡했다. 생을 통틀어 이런 시도 자체가 처음이었다.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니 친절한 직원이 명단을 체크하고 검은 안대를 나눠줬다.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간에서 나는 건지 안대에서 나는 건지 어딘가 축축하고 눅눅한 곰팡내 같은 게 나는 것 같았다. 여름도 아닌데.
실내는 조도가 낮아 꽤 어두컴컴했고, 자리는 자유롭게 앉을 수 있었다. 은아는 출입구와 가까운 오른쪽 뒤편 통로 쪽에 앉았다. 어떤 사람들이 올지 모르는 상태로 기다리는 은아의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10분쯤 지나고 출입구가 닫혔다. 모임의 호스트는 앞에 나와서 간략하게 룰을 설명했다. 게스트가 발언할 때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지나치게 큰 리액션은 하지 않는 것, 그저 잠잠히 듣는 것, 앞에서 발언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안대를 쓰고 있을 것, 자신에게 솔직할 것, 그리고 이 자리에서 들은 모든 내용은 절대 누설하지 않는 것이었다. 호스트의 안내가 끝나자 모두 안대를 썼다. 누가 먼저 발언을 할 것인지 손을 들면 호스트가 그 사람의 어깨를 살짝 터치하고, 그러면 게스트가 안대를 벗고 무대로 나가서 발언하는 식이었다.
“저는 바디프로필 찍은 친구들의 사진이 올라오면 확대해서 포토샵 흔적을 찾아봐요.”
“나는 한밤중에 2만원짜리 마라샹궈를 배달비 5천원을 주고 시켜서 배가 불러도 꾸역꾸역 앉은 자리에서 다 먹고 다음 날에 샐러드만 먹어요.”
“남자지만 여자들 많은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여자인척 글을 쓰면서 놀아요. 처음엔 수치스러웠는데 그게 습관이 됐어요.”
“내가 싫어하는 작가를 욕하면서 그 작가의 글을 계속 찾아봐요. 그러고는 치밀하게 분석해서 트위터에 욕을 올려요.”
누군가에겐 길티플레져였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일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의 말은 그다지 솔직한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온갖 고백을 듣다 보니 긴장이 풀렸고 호스트가 다음 발언자를 물었을 때, 은아는 조심스레 손을 반만 들었다. 이어서 어깨에 손길이 느껴졌다. 안대를 벗어 왼쪽 주머니에 넣고 무대로 향했다. 한겨울의 소극장 안에서는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단차가 그리 높지 않은 무대 위에 올라가자 핀 조명이 은아를 향해 환하게 비췄다. 은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이크를 잡자 빠르게 뛰는 맥박이 관객석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얼마간 정적이 흘렀을까, 갑자기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은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ㅆ. 씨발.” 그 순간이었다.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통쾌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짜릿함이 느껴졌다. 가끔 조용한 극장에서 소리를 꽥 지르고 싶다거나, 부서 사람들이 있는 채팅방에서 반말을 하고싶다거나 하는 등 알 수 없는 충동이 은아를 흔들 때가 있었지만 이렇게 행동으로 옮겨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이후에 무어라 떠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지만 감각만큼은 또렷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머릿속이 투명해지는 느낌. 마지막에야 겨우 정신이 들었고 욕설로 시작한 발언을 사과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은아는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와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관통했다. 어떤 새로운 순간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