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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문진 Apr 03. 2024

반성문

페이가 큰 작업 문의 의뢰 메일이 온 건 사이트에 프로필을 올려놓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침 공복에 고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마신 것처럼 가슴이 뛰었고, 아직 달성하지 않은 일임에도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의뢰인이 제시한 조건은 200자 원고지 10매 기준, 무려 10만 원이라는 꽤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면과 그에 따른 '소정의 고료'를 얻기 위해서 때때로 얼마나 비굴했었는지) 다만, 몇 가지 비밀 유지 서약이 있어서 대면으로 만나 계약서를 작성해야만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을 덧붙였다. 비대면 작업이 주를 이루는 사이트에서 이런 과정이 조금은 번거롭게 여겨졌지만 출판계약을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서 들뜬 마음으로 엄마에게 먼저 문자로 자랑을 했다. 엄마, 나 드디어 글로 적지 않은 돈을 벌 기회가 생겼어.
 

*


커피숍은 층고가 꽤 높았다. 실내에 가득 찬 사람들의 대화로 온 공간이 윙윙 울려대는 탓에 꼭 물에 빠져 바깥 소리가 뿌옇게 들리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긴장한 탓이었을까. 약속된 시간보다 40분이나 일찍 도착해서 클라이언트를 기다리는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있었고, 의뢰한 회사에서 나온 담당자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신신당부했다. 만약 계약사항을 위반할 경우 고료를 받지 못할뿐더러 손해배상까지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다소 위협적으로 느껴졌지만 내가 마감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닌 듯 보였다. 비밀 유지야 뭐 원래 다 하니까.


아무튼 기대가 됐고, 작업 자체도 꽤 흥미로웠는데 유명 감독의 영화 시나리오 중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주인공의 입장으로 반성문을 작성하면 됐다. 그래서 고료가 그렇게 높았구나 싶었다. 어린 시절 못다 이룬 영화감독의 꿈마저 간접적으로 이루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짜릿했고, 이번 일로 이쪽 분야로 물꼬가 트인다면 앞으로도 종종 작업을 할 수 있으리란 희망도 생겼다.
 
[세 살배기 아기가 첫째고, 둘째를 임신한 아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몰카범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상황이에요. 판사에게 호소를 해야하는 장면이니까 서사를 살려서 써주시면 될 것 같아요] 요청사항은 딱히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어떤 배우가 역할을 맡을지 혼자 가상 캐스팅까지 해봤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시작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진부하지. 가장인 아들이 감정에 호소하며 아빠한테 편지 쓰듯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엔딩크레딧에 내 이름 들어가고 유튜브에서 그 장면만 클립으로 돌아다니다가 백만 뷰 찍고 화제의 작가로 유퀴즈 온 더 블록에서 섭외 오면 어쩌지...? 완전 미쳤다.'
 
첫 번째 작업이 끝난 직후에 내가 혹시 치밀하게 사기를 당한 건 아닐까 의심했다. 과거에도 비교적 쉽고 단가가 낮지 않은 문서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의뢰받았다가 내 얼굴 사진과 신분증 앞뒷면을 찍은 사진을 전달한 후에 일을 요청한 회사가 잠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돈 몇 푼이 급해 내 정보를 두 손으로 떠먹여 줬던 기억이 쓰라려서, 입금이 되지 않는 동안 혹시 노동착취를 당한 건 아닌가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다행히 바로 계좌에 십만 원이 입금되면서 그 걱정은 멈췄다. 별다른 수정사항을 요구하지도 않아서 내심 으쓱했다.


곧이어 두 번째 작업 요청 메일도 왔다. 이번엔 다른 컨셉의 인물이었다. 똑같이 반성문을 작성하는 건 동일했으나 영화적 설정이 바뀔 수도 있어서 여러 조건의 버전으로 극본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번 주인공은 평소 바르기로 소문난 청년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중 성범죄 용의자로 몰려 소송까지 가게 되는 경우였다. 여자인 내 입장에서는 극사실주의라 영화가 아니라 페이크 다큐멘터리 같은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거기까지 신경 쓸 건 아니니 뭐...' 아무쪼록 빠른 고료 지급 속도와 나름대로 수월한 원고 작성이라 가성비가 괜찮은 작업이었다. 가능 하다면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었고 이 정도면 고정지출 정도는 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은 작업을 위해 충동적으로 12개월 할부로 아이패드 프로를 구매했다. 그러고 나니 진짜로 어딘가가 ‘굉장한’ 사람이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두 번째 작업물을 보내고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 돋보기에서 둘러보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글이 보였다. 내용은 굉장히 눈에 익었지만 전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내가 썼던 글이 낯선이의 손글씨로 투박하게 쓰여 있었다는 점이다. #대필 #감형 #판사 #자필 반성문 #호소문 #억울 #작가 출신 회사 해시태그가 달려있었다. 사진 아래에 3,372개의 댓글이 있었고 사람들은 "어그로 끌지마라", "미친 거 아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야?"부터 시작해서 "백퍼 주작", "계정 키우려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광고 하네" 등 옥신각신 설전을 벌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쓴 그 반성문은 어디에도 업로드를 한 적이 없었다. 계약할 때도 원본 유출 절대 금지가 주의사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일이지. 영화 홍보 노이즈 마케팅을 이렇게까지 하는건가...'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


메일함에 세 번째 작업 요청건이 도착했다. 이어서 쇼핑사이트에서 아이패드 배송이 시작됐다는 알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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