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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Jun 05. 2024

당신이 나와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길

한 마디에서 시작되는 행복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경험한 느낌을, 즉 나의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표현하는 것을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가 지금 내뱉는 말이 만들어지는 뿌리는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지. 각자가 가진 하나의 우주를 스스로가 표현하는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모두가 자신의 우주를 좋은 것으로 꾸미고 싶을 테지만, 슬프게도 말로 표현되는 그 우주는 말투나 어법에 따라 타인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과 말을 섞는 기회를 얻는다. 교류하는 말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손님은 원하는 음료를 주문하고, 나는 세부적인 사항을 물어보고 결제하고. 손님은 카페 이용에 대한 불편을 얘기하고 나는 해결 방안을 얘기하고. 하지만 놀랍게도 같은 내용은 건네는 말에 그 사람이 어떤 과거를 살아왔는지 현재 어떤 심리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가 있다.


 항상 밝게 인사를 하는 단골손님은 었을 때 고생했지만 지금은 여유로운 노후를 즐김과 동시에 앞으로의 미래도 희망차게 준비한다고 한다. 또한 항상 요건만 정확하고 빠르게 주문하는 손님은 공휴일, 주말 관계없이 출근하며 사업을 꾸리는 젊은 사장님이었다.


 반면 항상 주문을 두서없이 하지만 한 번에 결제가 되지 않으면 온갖 짜증을 내는 손님은 며느리감을 찾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그 며느리 후보에 우리 매장의 직원들도 물망에 올랐는지 '여긴 며느리감이 하나도 없어.'라며 그날도 짜증을 내고 간 걸 보면 말이다.



 다양한 형태로 쏟아지는 말들을 받아내며  나는 내가 내뱉는 말에 대해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의 결과, 나는 적어도 타인이 나와는 '다시는 말을 섞기 싫다.'라는 느낌을 주기는 싫었다. 나의 역사와 미래 담긴 내 우주가 '말'로 저평가되게 하기는 싫었다. 때문에 어떻게 말을 하고 말에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역시, 좋은 시선이다. 세상을, 타인을, 나를, 지금을 행복하고 긍정적이게 바라봐야 한다는 결론에 다 달았다. 그래야 나의 현재가 행복과 만족으로 충만하고, 그렇게 흘러간 현재가 과거가 되어 나의 탄탄한 버팀목이 되고, 그 버팀목을 발판으로 뭐든 할 수 있는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현재의 나는 입이 굉장히 걸고, 말을 툭툭 내뱉는 경향이 있다. 이 버릇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욕을 심심치 않게 하는 동성의 선배들과, 내 눈앞에서 성매매 경험을 풀어대던 이성의 선배들, 무슨 행동을 해도 우선 욕부터 먹고 보는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나는 약하지 않다'라고 발악하는 말투를 갖게 되었다. 이런 나의 말투도 나의 과거를 떠벌리고 다니는 매개체였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고, 아프니까 청춘인 시절을 살아왔으니. 그 시련을 겪으면 더욱 단단하고 강한 내가 되어 불안하지 않고 강력한 내가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름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앞서 말한 과거가 만들어낸 현재의 일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부분을 고치려고 해도 나의 감정이 격양되는 순간 문득 튀어나오고는 한다.


 고치려고 해도 되지 않는 원인은, 부조리에도 무작정 참았던 나였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선배 작가가 일을 시키면 바로 해결해야 하는 탓에 여의도 대로변 길바닥에 노트북을 놓고 일하던 경험으로 나는 무슨 일이든, 어떻게 해서든 해내는 나로 자랐고, 이유도 모르고 욕을 먹어도 죄송하다 말했어야 하던 나는 후임의 상황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선임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전에, 지금의 이 직장에 들어오기도 전에, 방송작가도 하기 그전에, 대학 때 소설을 쓰고 시를 필사하던 나는, 절대 이런 어른으로 자라고 싶지 않았다. 실연 휴강을 주는 교수님처럼 감성과 낭만으로 살고 싶었고, 나의 소설 속 악역에 대해 그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아 더 악하게 쓰지 못했다며 평가하는 교수님의 통찰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전공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다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나침반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된다. 미대를 나온 내 친구는 금융업에서 일을 하다가도 부업으로 타투이스트가 됐고, 장교를 했던 팀원은 감정적인 나를 항상 이등병 대하듯 어르고 달래준다. 문예창작을 전공한 나는 나의 고통이 나의 소설의 에피소드가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에피소드를 아름답게 풀어내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시발점에서 내가 가장 먼저 고쳐야 하는 것은 뱉는 '말'이고.


 이젠 나의 말이 나의 과거를 폄하하는, 나의 미래를 기대 없이 만드는 그런 표현으로 자리하게 두지 않을 테다. 어떤 시련도 이겨낸 과거를, 그래서 내가 꿈꾸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임을 표현하는 행위로 사용할 테다. 그래야 당신과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말을 섞으며 서로의 우주를 공유하고 이해하며 사회가 행복해질 테고,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또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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