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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Jul 08. 2024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금지

이해가 안 가면, 하지 마.

  나의 인생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일 투성이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생각을 심어준 뿌리는 무작정 주입시키는 의무교육이라든가, 이해할 수는 없는 교우관계 등등 무의식 안에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최근 깨달은 가장 큰 뿌리는 '아빠'이다. 이 생각을 하게 된 원천은 갑작스럽게 절뚝거리는 아빠의 걸음걸이 때문이었다. 의사보다 자신이 똑똑하다 믿는 아빠는 절뚝거리는 이유를 엉덩이 근육이 뭉쳐서라고 판단했고 1~2주간을 도수치료와 마사지 기기로 치료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손까지 저리다는 아빠는 현재 한의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료과정에서도 아빠는 매일 소주 1병과 담배는 한 갑 이상을 몸으로도, 돈으로도 소비하는 중이다. 그런 행위를 나와 엄마가 말리면 아빠는 벌컥 화를 내거나 삐치는 걸로 대응했다. 그렇게 매일 분란이 생기니 나도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그저 방으로 들어와 못 본 척을 했다.


 그렇게 3주 정도가 지났을까, 나의 몸에도 생리통과 몸살기운이 찾아왔다. 해외여행 후 여독을 풀지 못하고 과한 업무에 투입됐기 때문이었다. 평소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일상의 목표인 나는 바로 감기약과 타이레놀을 들이붓고 몸을 전기찜질팩으로 데우며 관리에 들어갔다. 그렇게 청각도 멍멍해졌을 때, 방문 너머로 아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연장 근무 덕에 고된 업무를 끝내고 빈속으로 누워버린 탓에 대답할 힘도 없던 나를, 아빠는 몇 번이고 계속 불러댔다.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나간 나를 부른 이유는, TV에서 쿠폰 알림 창이 떠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볼 수 없으니, 그 창을 없애달라는 것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던 나는 아빠의 요청을 무시하고 감기약을 더 찾아 나도 아프다는 것을 어필한 뒤 잠에 들었다. 그 뒤로 나는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한 감정에 깊은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잠시 죄책감을 느꼈으나, 그 또한 억울 역파도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가장 큰 억울의 원인은 아빠는 내가 아플 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으면서, 자신이 아플 때는 왜 저렇게 바라는 것이 많은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도 의아했다.


 앞선 글에서 풍기는 뉘앙스와 같이 나는 아빠에 대해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기억은 내가 방송작가를 그만뒀을 때의 일이다. 방송작가가 평생의 꿈이었던 나는 나의 정신과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일을 했었다. 연속으로 100일을 일한 적도 있고, 2주마다 돌아오는 녹화날마다 2박 3일 동안 잠을 못 자며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프리랜서였기에 스스로 다음 프로그램을 구해야 했으며, 쉬고 싶을 때는 백수 신세로 지내야 했다. 현재는 괴롭고 미래는 불투명한 상황의 끝에서 나는 많이 방황했다.


 그 방황의 길에서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잠시 방송작가 일을 쉬면서 카페 아르바이트나 해볼까 하고 이력서를 작성하던 도중 혹시 몰라 면접을 봤던 다음 방송 프로그램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합격 결과를 준다는 날짜보다는 늦게, 그리고 출근 바로 전날에 연락을 준 것을 보면 내가 아닌 다른 합격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근무 스케줄을 들어보니 그 합격자가 그 자리를 왜 거절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해당 프로그램은 시사 토론 프로그램이었지만 예능 성향이 있어 정치인과 평론가 등 다양한 직종의 패널이 다수 출연하는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그 뜻은 녹화는 주말에 진행되고 내가 그만두지 않는 이상 프로그램이 끝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쉬는 날은 토요일 녹화 다음 날 일요일 오전이 전부였고 이 굴레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엄마와 카페에 이력서를 넣어본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화를 하다 방송 프로그램 합격 전화를 받고 난 후, 나는 잠시 걱정이 되었다. '내가 다시 이렇게 고된 프로그램을 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방송작가를 때려치울 수는 없으니 언젠가는 해야 할 텐데, 못하겠다고 하는 건 너무 나약한 거 아닐까?'라는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때 엄마가 말했다.


하지 마, 때려치워. 너 얼굴이 지금 사색이 됐어.


 간호사인 엄마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빛인 사색이 뭔지 정확히 알고었다. 그리고 그 빛이 자신의 딸에게서 스치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고 했다. 이러다 정말 내 딸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방송작가를 그만두고 카페에 다니기 시작했다. 5시간만 일해도 돈을 준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충분한 잠으로 충전된 체력과 선배 작가들에게 떨던 아부 실력으로 나는 무난하게 적응했다. 하지만 당연히 힘든 일도 있었기에 엄마에게 그날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털어놨던 어느 날이었다.


 네가 힘들다고 때려치워놓고 왜 또 힘들다고 징징대?

 


 퇴근해 옷을 갈아입던 아빠는 갑자기 소리쳤다. 도란한 분위기가 깨진 엄마와 나는 놀랐고 아빠는 이런저런 욕을 섞어가며 과하게 화를 냈다. 그 화가 이해가지 않았던 나는 따져 물었고 아빠와 나의 싸움을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리고 싸움의 원인이 이내 밝혀졌다. 아빠는 내가 나름 자랑스러웠던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때려치운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었다.


 아빠는 내가 정신과 상담을 받던 것도, 지하철에서 몇 번이나 쓰러졌던 것도, 출근길 횡단보도에서 차라리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에게 떠벌릴 별것도 아닌 나의 직업이 중요했던 것이었다. 그 뒤로 아빠와 나는 3년 정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 그래서 나는 지금 아빠가 다리가 아프니 이것저것 해달라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빠는 그렇게 자랑스러운 인서울 4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직장을 꾸준히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갑자기 농사를 짓겠다며 일주일에 4일 정도는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다 얻은 병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아빠가 좋다고 해놓고 아픈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빠를 공손히 받들어 모시지 않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아빠도 자식에게 공경을 받는 것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준 것도 없이 당연히 원하는 것이고. 하지만 아빠에게 받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공경을 하는지도 모르겠는, 그 결핍이 주는 혼란이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나의 한 뿌리에게서 뻗어 나온, 나에게 가장 많은 시련과 결핍을 준 생각의 원천은 바로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아빠는 생각보다 나에게 '그래야 할 것 같아서'의 뿌리를 많이 심어주었다.


 일례로 아빠는 책을 많이 읽으려면 속독을 해야 한다며 눈으로는 한 문장 먼저 읽고 머리로는 읽은 문장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줬고, 노벨 문학상을 탈 작가이니 읽어보라며 김훈 작가님의 소설과 고은 작가님의 시집을 읽어보라고 했었다. 그 결과 나는 최근까지 책 읽는 재미를 찾지 못했었고 김훈 작가의 '언니의 폐경'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글이나 가슴 운운하는 한국 문학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척을 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다른 방면으로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척들이 무궁무진해졌다. '죄송하다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못한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해내야 할 것 같아서.', '쉬면 안 될 것 같아서.' 등등. 이 과정에서 가장 배려하고 사랑해야 할 ''를 배제시켰고, 그 결과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어서 이뤄낸 행복이나 성취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헤르만 헤세는 소설 '싯다르타'를 쓰던 중, '스스로의 체험 없이 이 책을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라고 판단하고 일 년 반동안 집필을 멈췄다고 한다. 위대한 작가도 경험을 그렇게나 중요시하는데, 나는 왜 나의 경험과 의지보다 남의 시선과 실체 없는 규율에 나의 삶을 흘려보냈을까. 결국은 아무 행복도, 깨달음도 없는 상황을 탓할 수도 없을 정도로 허상의 규율을.


 그래서 이젠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금지인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


 목적 없이 튀어나온 돌에 치이고 찢겨 '당연히 아픈 거야'라고 넘긴 상처는 결핍이 되어 방어기제를 만들 나를 모난 사람으로 만들겠지. 치이더라도 이유를 알고 나를 채워나가면 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모가 나버리기 시작한 나의 모습이 괜히 무서워지는 요즘이다.



 이후 나는 4개월 동안,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고, 남이 기대할까 봐 지례짐작하고 배려를 하지도 않았다. 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작가님의 책을 읽으면서 한국 문학에 대한 재미도 찾아가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성장은 남의 호의를 거절했다. 이성이 사귀자는 제안에, 거절하면 후회할까 봐, 이런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 봐 수락해 버리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끝내버렸다.


 내가 가진 가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짓 중에 가장 위험한 일 중 하나였다. 남자를 만나야 할 것 같아서, 연애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상대방의 호감을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내 취향을 밝히면 소위 말하는 '김치녀'가 될 것 같아서 거절하지 못하고 연애를 시작해 사건을 만드는 일.


 남자에 대해 긍정적인 모델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자기 손으로 밥만 퍼먹어도 괜찮은 남자였다. 그런 괜찮은 남자가 호감을 표하면, 거절하면 안 되고 어차피 남자를 만나야 하는 사회이니 그렇게 나는 연애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나의 마음에 대한 의견은 배제되었으니 관계가 진전될수록 갈등만 쌓여 결국 연애 기간은 짧고 분란만 가득한 경험이 됐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희박한 행복을 위해, 과거의 나를 지켜줬던 경험과 관계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진정으로 내가 소중해졌기 때문에. 나의 일상이 행복했고 나의 현재를 위해 견뎌 준 과거가 고마웠다. 그 주변의 관계들도. 그러기에 나는 그것들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 의무가 결국은 나의 미래까지 단단하게 지켜줄 거란 확신도 있다. 비록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지금의 나는 항상 최선일테니 미래의 나도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살아가보자, 단단하고 당당해진 나와. 이제야 오늘이 견디는 것이 아닌, 나와 함께 행복하게 보내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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