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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랑 May 15. 2024

남은 적이 아닌, 나와 같은 순수한 존재들.

남은 날 비난하지 않으니, 질문하고 소통해 보자.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 나름의 결핍이 있다는 사실을, 인생의 방향이 그 결핍을 채우는 방식으로 결정는 것을 아닐까?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낸 결핍은, 남이 나에게 쉽게 호감을 갖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결핍의 이유에 대한 생각은 꽤나 많은 방향과 긴 시간 이어져왔다. 최초의 기억을 생각해 보기도, 애착검사를 해보기도, 상담 시에도 꽤나 자주 나왔던 주제였다.


최초의 스토리가 있는 기억을 꺼내보자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수채화 물감을 사용하던 미술시간이었는데 붓에 묻은 물감을 씻어내던 물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나는 어찌할지 모르다가, 아마도 내가 학교에 입학한다고 부모님께서 사줬을 까만 토끼털코트로 바닥에 쏟은 물감 씻은 물을 닦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나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나 혼자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대걸레를 쓰는 것도 민폐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했. 리고 그 기억의 마지막은 그걸 또 그걸로 닦으면 어떡하냐며 소리치던 담임선생님의 질타였다. 이 기억은 꽤나 짙은 수치심으로 남았는데, 그래서 나에게 모른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라 자리 잡게 되었다.


 무지가 수치가 될 때의 또 다른 기억은 대부분 부모님의 손길이 상대적으로 부족했을 때였다. 부모님은 맞벌이 었다. 어머니의 직업은 간호사였고 아버지는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빠와 나를 스카우트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그걸 뚝심 있게 6학년까지 하기를 원했다.


 기억의 한 부분은 내가 걸스카웃에 처음 들어갔을 때였다. 걸스카웃의 복장은 꽤나 복잡했는데, 시간이 부족했던 엄마는 가슴에 달아야 하는 배지를 어깨띠를 고정하는 곳에, 어깨띠를 고정하는 핀은 어딘가에 꽂아 놨었다. 그리고 걸스카웃이 처음 모이는 날, 친구들은 내가 입은 옷을 보고 말했다. '그거 거기다 하는 거 아닌데?'


 또 한 번은 뒤뜰야영 때 한 명씩 식재료를 가져와야 하는 때, 나는 쌀을 담당했다. 엄마는 바빴기에 나는 그냥 쌀통에서 쌀을 퍼갔다. 하지만 알고 보니 쌀을 불려 와야 했던 거였다. 초등학교 4학년인 내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런 최초의 기억이나 최초의 감정 연결이 중요하다고 느낀 것은, 살아오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낄 일이 일어났을 때 최초의 기억과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내 성급한 일반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방송작가 시절에도 이런 적은 많았다. 막내작가 시절이었고 교양 프로그램을 하던 나는 갑자기 같은 제작사가 제작하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들어가게 된다.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됐던 때였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조차 몰랐고 집에서 자야 하는지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던 때였다.


 갑자기 출근을 했더니 서브작가들이 코너작가에게 혼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코너작가가 나를 불렀다. 다짜고짜 나에게 너는 뭘 했냐 물었다. 그때  서브작가들이 다짜고짜 섭외 예정인 연예인들 리스트를 주고 이 사람들의 반응을 찾아보라고 했었나 그랬다. 때문에 연예기사부터 댓글, 커뮤니티 댓글까지 뒤졌던 기억이 있었다. 때문에 이런 것들을 조사했다 코너작가에게 말했더니, 지금 이게 중요하냐부터 시작해 서브들 안 도와주고 이 딴 거나 하고 있었냐 등등 나는 당시 이해하지 못할 혼이 났. 그 외에도 오후 3시에 출근한 코너작가한테 점심 먹었냐고 안 물어봤다고 혼나기, 한 방울 튄 식사의 흔적을 치우지 않았다 등등.


 나의 최초의 기억과 최초의 직업이 주는 경험이 만나, 사람들은 나에게 쉽게 호감을 주지 않고, 모른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나는 호감을 얻으려면 눈치를 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최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생각으로 살아온 나는 준비성이 철저해졌지만 불안감이 많아졌고 작은 일도 꼼꼼하게 준비했으나 내 모든 시간을 일에 쏟아부었으며 남의 눈치를 보느라 나를 무시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자연스럽게 나는 자존감이 낮은 성인으로 자라났고 애착검사 결과 자기를 부정하고 타인을 긍정하는 유형이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도 나는  타인은 나보다 무조건 잘나고 멋진 사람이니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생각은 무럭무럭 자라, 내가 아는 것을 남들이 모르거나 내가 할 줄 아는 것을 남들이 못해 나에게 도움을 구할 때, 그들이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노력을 안 해 안 하는 것이고, 귀찮아서 나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니 정말 미친 사람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내가 무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들 나처럼 결핍이 있고,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나와 같이 힘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 지레짐작하지 않고, 대놓고 상대방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지 않고, 모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몇 주 이렇게 살아보니, 정말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내가 일하는 카페는 대형 프랜차이즈이기 때문에 하루에 아주 많은 사람을 마주치고 말을 섞는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이 직업이 꽤나 괜찮은 직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중 제일 싫어하던 일을 꼽으라면 단연 손님응대였다. 나 스스로도 서비스가 좋지 않은 걸 알아서 남들이 나에게 아무리 일을 잘한다 말을 해줘도 나는 말했었다. '대신 서비스가 안 좋잖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런 마인드를 가지고 손님을 응대하니 손님의 태도 하나, 말투 하나가 모두 나를 무시한다 생각했으니까. 짜고짜 들어와서 '아아요.' 하는 주문도, 음료를 주문하다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고르러 사라지는 것도, 다양한 케이크가 진열된 쇼케이스를 가리키며 '이거 줘요.' 하는 것도, 결제가 끝나지 않았는데 그냥 가는 것도, 그래놓고 나중에 와서 주차권과 영수증을 안 받았다 화내는 것도. 모두 나를 무시해서 저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주제로 글을 쓰기로 시작하고 나의 결핍을 치유하기 위해 해결책으로 찾은 '질문'을 하기로 한 결과, 아주 놀라운 일이 내 안에서 벌어졌다.


 다짜고짜 들어와서 '아아요'를 외치는 사람에겐

'주문하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으시죠?'라고.

갑자기 다른 품목을 고르러 사라지는 사람에겐

'더 필요한 것 있으세요?'라고. 쇼케이스에 대고 '이거 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겐 '원하는 케이크 이름이 어떻게 될까요?'라고. 수증과 주차권을 안 받고 가는 사람에'주차권 없으면 번거로우신데 괜찮으세요?'라고.


 그랬더니 날 무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저 주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혹은 정신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물어보면 놀라며 맞다는 답을 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사과까지 하는 분도 계셨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고객에게 말도 편하게 걸기 시작하고 스몰토크도 자연스러워졌다. 손님이 일로 느껴지지 않고 친구가 놀러 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라고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상사의 비위를 맞춰야 해서 출근이 괴로운 것도, 비위를 맞추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예의만 지키고 내 할 일만 잘하면 될 일인데 굳이 잘 보여야겠다는 욕심으로 나를 괴롭히는 걸 테다.


 꼬장꼬장하게 늙어가지 않는 방법은, 편견을 없애고 허세를 없애고, 그저 있는 그대로 남에게 비춰보이지만 스스로는 나를 믿고 굳건히 존재하는 것, 가장 어렵지만 해내야 하는 그것이 답일 테다.


 평생 동안 굳어온 버릇이라 몇 번의 고난이 생면 다시 되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제 나의 문제를 알았고 남이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생각의 변화, 물어보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이 사실만 기억하면 다시 나를 다잡고 사람들을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꼬장꼬장한 노인이 아닌, 모두에게 다정하고 스스럼없이 타인을 품어주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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