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를 시작했지만, 미련이 남아 여기저기 철거 업체를 알아보았다.
미련 뚝뚝 떨어지는 마음으로 남은 총알에서 해결할 수 있길 바라며 두어군데 전화를 했지만, 택도 없는 예산이었음을 깨달았다. 지역 업체 몇 군데는 아파트나 가정집 철거가 아니라 상가 철거만 한다고 했고, 숨고를 찾아 아파트 전체 철거를 하는 업체를 찾았지만 타지에서 오는데다 비용이 만만찮았다.
그 업체에 견적을 보러 오기 전, 지금 아파트가 몇평이고 붙박이가 몇개고, 어느어느것들을 뜯고 폐기물을 처리해주시면 된다고 문의했다.
"현장을 봐야 알겠는데요. 이번 주 금요일에 그 지역을 지나갈 일이 있어요. 저녁에 찾아뵈도 될까요? 아마, 현장을 보기 전이지만 대략 금액은 .... "
젊으신 목소리의 사장님은 친절하게 예상되는 시공 금액의 하한선을 불러주셨다.
좋아 내가 한번 뜯어보자.
일단 벽지를 뜯자. 명의만 우리 것이고 은행 것인 지금의 집으로 오기까지, 우리는 남의 집을 전전하면서 앞 뒤 베란다의 곰팡이의 습격에 이미 많은 피로가 올라있었다. 그러던 중, 직전 전세집에서 규조토 페인트를 만나뵙고나서야 우리가 그동안 미개하고 어리석은 인간 중에서도, 곰팡이로 인한 피로한 삶을 살고있는 인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뭐, 우리 그냥 "올 퍼티+ 올 규조토" 해보자 는 결론을 냈다. 역시 그런 성급한 결론은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초록 검색창에 ‘올퍼티’ ‘올페인트’를 찾아보면 업자들도 왠만해선 안하고 싶다는 내용의 블로그도 있을 정도의 극악의 시공이었다. 우리가 올퍼티에 꽂힌 이유는 그냥 예뻐서였다.
우리가 계획한 올퍼티 + 올규조토 작업은, 일단 벽지를 모두 뜯어야 맨 콘크리트 벽에 퍼티를 처덕처덕 발라서 맨들맨들한 새로운 벽 처럼 반듯반듯 하게 펴 발라야 한다. 헤라로 펴 바르다보면, 자국이 남는데 이 모든 부분을 샌딩기로 또 갉갉갉 갈아낸다. 그 다음에 다시 페인트를 반듯반듯 펴발라야한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할일은 벽지 뜯기였다.
장비를 착용하기로 했다. 먼지가 많으므로 KF94 마스크보다 좋은, 일회용 방진마스크보다 좋은, 방독면같이 생긴 KF95 방진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리고 고글을 썼다. 벽지와 벽 사이의 먼지가 공간 가득 피어올랐고, 밀칼로 밀어낸 시멘트 가루가 날렸다. 작업의 시작인만큼 방호장비에 신경을 썼다!
“헐- 이것봐!”
혹시 살면서 도배를 해본적이 있는가? 난 없다. 그래서 정말 헐 이었다. 우리집은 대략 네번정도 벽지를 바꾼 듯 했다. 어떻게 아냐고? 벽지가 네겹이었기 때문이다. 장판은 두번정도 바꾼듯 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아냐고? 장판도 두겹이었으니까! 월세나 전세로 아파트에 들어가서 도배 장판 해주세요 하면 이렇게 위에 덧바르는 건지 몰랐다! 모두 그렇게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내가 본 현장의 모습은 그동안 남의 집을 전전하며 살아온 십수년의 내가 사회적으로 어떤 암묵적으로 세입자에게 행해져온 배신의 현장에 눈을 뜨게 했다.
각설하고, 스테인레스 스크래퍼와 밀칼로 벽지를 뜯다보면, 어떤 때는 네장이 한번에 샤악- 벗겨지지만, 한장, 두장, 세장, 뭐 애매하게 벗겨지기 일쑤였다. 콘크리트벽에 붙은 벽지는 그나마 양호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초배지가 콘크리트벽에 커다란 격자무늬로 발라 작업했을 본드와 딱 붙어서 그 부분만 빼면 수월하게 벗겨졌다. 문제는 석고보드였다. 석고보드에 밀칼을 잘못 들이대면 석고보드를 찢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적당히 하다보면, 벽지나 초배지가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석고보드를 지저분하게 떼고 있을 쯤, 우리는 알게 되었다. 벽지에서 페인트로 넘어갈 땐, 그냥 벽지에 바른다고. 초배지까지 힘들게 뗄 필요가 없다고. 계획이 철저하면 뭐하나. 사전 조사가 이렇게 빈약해서야. 지금에서야 그래도 떼길 잘했다고 하지만 벽지 떼기 전에 알았다면, 그리고 벽지 철거가 이런 고생스러운 일임을 알았다면 아마 안했을것이다!
그리고 지인 중에 다세대 건물을 올린 분이 이야기해줬다.
"야, 철거는 진짜 아니야."
아 좀, 미리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