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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사 Oct 20. 2019

방관주와 영혜빙 2 : 혼인 이후

지기 사이의 갈등


  평생을 살면서 나를 이해해주는 벗 한 명만 있다면, 다시는 외롭지 않을 텐데. 모든 사람의 꿈이 아닐까? 지기란 나를 알아주는 벗이라는 뜻이다. 방관주와 영혜빙의 만남을 보며,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서로가 서로의 꿈을 이뤄주는 존재라는 점이 부러웠다. 방관주는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여성이라는 성별을 영혜빙에게 털어놓고, 영혜빙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었던 자신의 꿈을 관주와의 인연을 통해 이룰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섬기며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안달하는 삶이 아니라, 동등하게 서로를 이해하며 아낄 수 있는 삶. 나도 지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둘의 관계는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둘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방관주는 사회적 성공이 가장 큰 목표였다. 남성으로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것. 남성의 사회에 들어가서 성공하는 이들은, 동등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것보다는 상하의 권력관계에 편입되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점에 희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방관주는 성공할수록 목이 마르다. 자신이 신체적으로 남성이 아닌 것에 열등감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지위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영혜빙의 신분은 방관주의 사회적 성공에 따라 올라간다. 방관주는 심지어 이에 대해서도 영혜빙을 질투한다. 영혜빙이 관주의 성공으로 인해 부인의 봉작을 받자, 관주는 차갑게 웃으며 혜빙을 조롱한다. 나 같이 훌륭한 남편을 만나 너는 아무 노력 없이 영예를 받으니 참 좋겠다고. 영혜빙은 웃으며 다 그대의 은덕이며, 여자가 남편의 은총을 입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아니냐고 답하지만, 방관주는 오히려 자신이 남자로 태어나지 않음에 괴로워한다. 관주는 뭐가 문제였을까? 남성으로 살면서 남성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받고 있지만, 그는 그에 만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남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깊이 절망할 따름이다.

  방관주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힘들어한다. 이는 전통시대 여성에게만 허용된 범주이며, 사내대장부는 아녀자처럼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혜빙과 이별할 때 아무리 슬프고 안타까워도 그 감정을 억누른다. 혜빙에게 제사를 잘 맡아 수행하라는 도리를 강조할 따름이다. 아무리 벗으로서 서로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구조와 남녀에게 주어진 도리를 피할 방법은 없다. 대외적으로 이들은 남편과 아내이고, 그 신분에 맞게 규정되고 그 의무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벗의 관계는 균열이 가고, 갈등과 오해가 자라나며 서로에 대한 불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관주의 옆에 있는 유모는 불만이 많다. 외부적으로 선망을 받고 있는 부부이지만, 둘은 음양의 이치를 저버렸다고 여기는 것이다. 음과 음의 만남.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는 여성과 여성의 성적 관계에 대해서는 미처 다룰 수 없었던 모양이다. 관주와 혜빙은 평생 성관계를 하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 이에 대해 둘 다 불만을 갖지 않으며, 스스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아쉬움을 표시하지 않는다. 자식이 없다는 서평후의 한탄에도 혜빙은 담백하게 모든 것을 얻을 수 없으니, 그건 결함이 될 수 없다고 답할 뿐이다. 유모는 탄식하며, 관주와 혜빙에게 훌륭한 군자를 얻어 둘이 모두 그 아내가 되어 자매처럼 지내라는 조언을 하지만, 관주는 유모에게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더 이상의 말을 한다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경고한다. 혜빙은 유모의 충성심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며 그를 두둔하지만, 관주는 혜빙을 쏘아보며 여자의 도리를 알라며 가장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답한다. 이때 관주는 둘의 관계가 더 이상 동등한 벗이 아니며, 가장과 부인의 상하 관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둘은 혼인할 때만 해도 밖으로는 부부이나, 내심으로는 지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방관주는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며, 가장으로서 확고한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영혜빙을 내려다보고 그녀에게 아내의 도리를 지킬 것으로 요구한다.

  둘의 사이는 겉으로는 온화하나, 방관주는 사회적 성공으로 인해 영혜빙이 그 혜택을 나눠 받게 될 때에 매우 예민해진다. 관주가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승상이 되어 황제에게 책과 선물을 하사받는데, 이때 그 하사품을 양자에게 모두 물려주고 혜빙에게는 조금도 주지 않는다. 혜빙은 왜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느냐고 묻자, 관주는 그것이 혜빙에게 조금도 쓸모없는 것이며, 욕심이 과하다고 나무란다. 혜빙은 잔잔하게 웃으며, 나에게 쓸모없는 것이 당신에게는 유독 쓸모가 있겠냐고 묻는다. 이 말은 너와 내가 같은 여성이며, 그 쓸모가 동일할 것임에도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확고히 나누는 관주를 조롱하는 것이다. 관주는 더 이상 혜빙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고, 자신은 남자이고 혜빙은 여자라고 인지하며, 서로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나뉘어져 있다고 선을 긋고 있다. 혜빙은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나, 관주는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며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지 말라며 혜빙에게 입막음을 시킬 뿐이다. 관주는 이미 잊어버렸다. 혜빙이 자신의 인생을 다 걸어 관주의 비밀을 지켜주었다는 것을. 관주는 혜빙에게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방관주는 승승장구하며 남자로 성공할 수 있는 최고 지점에 도달하나, 하늘의 벌을 받게 된다. 음양을 바꾸어 세상을 속였다는 이유로, 죽음에 해당하는 천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는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또 한탄하며 죽음에 이른다. 영혜빙 역시 방관주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고 만다. 차라리 관주와 혜빙 모두 남장하여 사회적 성공이 가능했다면,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관주는 남자가 아니라는 점에 평생 열등감을 지니고, 그러한 열등감을 갖고 있지 않는 혜빙을 질투한다. 남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었기에. 혜빙 역시 동등한 입장의 지기를 원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관주는 남자가 아니었지만, 남자보다 더 남자처럼 행동하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둘 모두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얻었다. 그들은 행복했을까? 방한림전의 작가는 여성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유교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작가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던가? 남성이 되고 싶은 여성과 남녀관계의 틀에 들어가길 거부하는 여성을 상상해냈고, 이 둘이 서로 부부의 인연을 맺어 서로의 꿈을 실현시키는 과정을 그려내었다. 그러나 남성이 되고 싶은 여성은 성공하면 할수록 남성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었고, 점점 더 여성을 혐오하며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다. 남녀관계의 틀을 거부한 여성 역시 비록 육체적인 성별의 여성과 혼인하여 동등한 관계를 꿈꾸지만 남성의 신분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고 아내의 도리를 요구받으며 여성이 해야 할 제사의 임무를 피할 수 없다. 그녀가 혐오해 마지않았던, 남성을 섬기며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기색을 살펴야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만든 두 여성의 도전을 통해, 당대 사회에서 그 불온한 상상력이 어떤 파국을 맞는지를 그려낸다. 지기이면서도 지기일 수 없었던 방관주와 영혜빙. 백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지기를 만들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지기가 될 수 있을까? 남성중심사회의 변화를 만들지 않고, 그 사회를 그대로 둔 채 자신의 모습과 상황만을 바꿔나간다면 결국 자기혐오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성보다 나은 성취를 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여성들. 남성보다 더 남성적으로 바뀌어 상하 질서를 중시하는 여성들. 그들의 모습에서 방관주가 비쳐 보인다. 아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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