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사 Oct 23. 2019

천지 간에 갈 곳이 없구나

전불관, 향랑, 강진 비구니

여기, 조선에 살았던 세 여성이 있다.


1. 전불관


불관은 평안도 강계 지역에 살았던 기생이다. 불관의 어머니는 성매매 여성이었다. 현대어로 말하면 공창에 속한 성매매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관에 속한 관기로, 벼슬아치들의 성노리개로 평생을 살았다. 어느 날 그녀는 외지에서 온 전씨 무관과 하룻밤을 보냈는데, 아이가 생겼다. 전씨는 그녀에게 자신과 상관없는 아이라 소리쳤고, 아이의 이름을 불관(나와 상관없다는 뜻)이라고 하라고 했다. 불관이 세 살 때 엄마가 죽었고, 관기들의 빨래를 하며 자라다가 열여섯에 관기가 되었다. 관기 말고 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도움을 준 적도, 연락을 한 적도 없었다. 불관은 자신과 처음 관계한 손님과 사랑에 빠졌다. 그 손님은 불관에게 돈을 가져와 기생 명부에서 빼내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지만, 떠난 후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래도 불관은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다른 손님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신관 사또는 형틀을 늘어놓고 병졸들에게 불관의 옷을 벗기고 마구 때리게 하며 갖은 모욕을 주었다. 네까짓 기생한테 정절이 가당키나 하냐. 기생 이모들은 불관에게 죽지 않으려면 사또 말을 빨리 들으라고 타이른다. 불관은 사는 길을 택하자면 짐승 같이 될 것이라 여겨 폭포 아래로 몸을 던졌다.


2. 향랑      


향랑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계모에게 맞으며 집안일에 혹사당했다. 십 대의 어린 나이에 부모가 정해준 곳으로 혼인을 했지만, 남편은 폭력을 휘두르고 조금의 애정도 주지 않았다. 폭력이 심해져 향랑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보다 못한 시부모가 그녀를 친정으로 보냈다. 친정에 돌아왔지만, 계모와 부친은 욕설을 하며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죽은 모친의 가족이 있는 외가에 갔더니 외가 식구들은 서둘러 개가를 요구했다. 향랑이 다시 혼인하기 싫다고 거부 의사를 밝혀지만, 외삼촌은 우리가 널 먹여 살릴 수는 없으니 개가하는 수밖에 없다며, 향랑의 혼처와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갈 곳이 없는 향랑은 전남편의 집으로 갔지만, 전남편은 이미 재혼한 상태였다. 향랑은 시부모에게 집 옆에 머물 곳을 마련해주면 그곳에서 조용히 살겠다고 애걸했다. 그러나 시부모는 이제 너와 우리는 인연이 끊어졌다며 향랑을 내쫓았다. 향랑은 다시 혼인하기 싫었다. 예전의 지옥 같던 결혼생활이 다시 시작될 걸 생각하면 두렵기만 했다. 하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목숨을 끊는다면 다들 내가 다른 남자와 도망갔다며 나와 우리 부모를 욕하겠지. 향랑은 길을 가던 여자아이에게 손짓했다. '아이야. 나랑 잠깐 있어줄래? 있잖아. 내가 죽으려고 해. 내가 죽으면 마을에 가서 내가 여기서 죽었다고 좀 알려주겠니?' 여자아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향랑은 옆의 연못에 들어갔다. 물의 깊이가 얕아 몸이 다 들어가지도 않았다. 향랑은 고개를 숙여 머리를 물에 넣고 숨을 참았다. 물이 코에 들어가 폐가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는 것보다 이 고통이 더 참을 만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보던 여자아이가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향랑의 시신이 연못 위에 떠 있었다.  향랑이 소녀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넓으냐, 천지가 저렇게 크다지만 이 몸 하나 의탁할 곳 없으니, 어찌 물에 빠져 고기밥이 되지 않으리.”     


3. 강진의 비구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강진 읍내에 살았던 여성이나 성도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1803년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하던 도중 길에서 만난 여성이다. 십 대 중후반의 어린 여성이 삭발을 한 채, 우락부락한 사내들 몇 명에게 붙잡혀 관아로 끌려가고 있었고, 중년 여성이 울면서 그 무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정약용은 그 일행 옆으로 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어린 여성은 울먹이며 말이 없고 중년 여성이 대신 말문을 열었다.

“이 아이는 제 딸이고 지금 열여덟인데 소경인 점쟁이에게 혼인했지요. 집을 나와 절에 들어갔다가 남편이 관아에 알려서 지금 붙잡혀 오는 길입니다.”

정약용은 의아해서 다시 물었다.

“아니 다른 남편감도 많을 텐데 왜 그런 혼처를 잡았는가?”

중년 여성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소경은 지금 마흔아홉 살입니다. 이미 두 번이나 결혼을 했었지요. 처음 결혼에 두 딸을 얻었고 두 번째 결혼에 얻은 아들이 있지요. 우리 영감이 이 집이 잘 산다는 말에 혹해 혼처를 잡았답니다. 딸을 결혼시키면 영감 노후는 보장된다는 매파 말에 넘어가 얼굴도 안 보고 날짜를 잡았지요. 저는 사위가 소경인지도 나이가 그렇게 먹었는지도 몰랐어요. 혼인날 신랑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라고 눈물이 나던지! 이미 정한 혼사를 물릴 수도 없어 눈물을 닦고 초야에 아이를 신방에 들여보내니, 한바탕 요동치는 소리만 들리더군요. 새벽에 나온 아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지요. 무거운 마음으로 시집으로 보낸 지 몇 달 되지 않아 아이는 저를 찾아왔어요. 수척한 얼굴로 몸은 야위어 있었지요.

“어머니, 저 못 살겠어요.”

“무슨 일로 그러니?”

“남편이 몽둥이로 저를 때리고 항상 의심해요. 재물을 훔쳐 친정에 보낸다고. 전실 자식들도 남편에게 저를 헐뜯고 아무도 저를 믿어주지 않아요. 얼마나 인색하고 화가 많은지, 저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죽을까 여러 번 생각했지만 그것도 힘들어요. 저 절로 가겠어요.”   

“네가 젊은 나이에 어떻게 중이 되어 산속에서 산단 말이냐? 차라리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는 게 낫지.”

“어머니,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아이가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소경이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군요. 도망친 딸아이를 내놓으라며. 저는 간 곳을 모른다고 답했지요. 몇 달 후에 한 절에서 연락이 왔지요. 딸이 그곳에 있다고. 저는 저도 모르게 소경에게 찾아가서 울음을 터트렸어요. 그 곱던 내 아이가 중이 되었다고. 소경은 관아에 고해서 아이를 데려왔고, 아이는 한밤중에 도망가 다른 절로 숨었지만, 소경은 사람들을 시켜 아이를 찾아냈어요. 그래서 지금 관으로 끌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혀를 차며 말했다.

"저렇게 시달림을 받으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겠구려."


전불관과 향랑은 자결했고, 강진의 비구니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불관은 성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없었고, 향랑은 경제권과 발언권이 없었고, 비구니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지만 갈 곳이 없었다. 어이없게도 조선 사대부들은 전불관과 향랑을 정절을 지킨 여성으로 추앙했고 열녀문을 세우자는 상소를 올렸다. 천지간에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을 열 이데올로기의 화신으로 포장해 더 많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이용했던 이들이, 바로 당시의 지식인이고 문인이었다. 그러나 고작 이백 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사건들이 과연 과거에만 존재했고,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매매 여성의 인권 침해, 가정폭력, 아동결혼, 강제결혼, 가정 폭력 피해자의 사회적 고립, 재혼 여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여성의 사회 진출의 제한 등, 이 중 일부는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 세계 어느 곳에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약자가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유지한 것은 조선 왕조 육백 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인권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이 시대의 향랑과 불관과, 이름 모를 소녀가 돌아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우리 사회에 존재할 수 있도록.

     

이전 05화 이옥영 2 : 헤어진 가족을 찾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