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사 Oct 21. 2019

이옥영 2 : 헤어진 가족을 찾아

: 임을 찾는 여정

  옥영은 최척과 혼인하고 2년 후 아들 몽석을 낳는다. 몽석은 만복사의 부처가 꿈에 나타나 점지해준 아이로, 등에 손바닥만 한 붉은 점이 있었다. 늦봄의 어느 밤, 달이 휘영청하게 뜨고 꽃잎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최척이 퉁소를 불자, 옥영은 시를 지어 읊었다.


신선이 퉁소 불 제 달은 나지막하고

바닷빛 파란 하늘엔 이슬이 자욱하네.

푸른 난새 함께 타고 날아가리니

봉래산 안갯속에서도 길 잃지 않으리.


이 시의 앞 두 행은 봄밤에 퉁소가 울려 퍼지는 분위기를 형상화하고 있고, 뒤의 두 행은 어둡고 희미한 삶의 여정에서 옥영이 언제나 최척과 함께 하리라는 의지를 담고 있다. 옥영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너무도 기뻤지만, 인간사에 이별이 많은 것을 깨닫고 서글픈 마음이 밀려왔다. 옥영은 눈물을 흘리며 최척에게 혹 이별이 찾아올까 두렵다고 마음을 토로했고, 최척은 옥영을 위로하며 불행이 닥치더라도 마음을 편안히 갖기를 조언했다. 둘은 서로를 자신을 알아주는 벗으로 여기며 단 하루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 당시는 임진왜란 중으로 전쟁의 여파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옥영의 두려움은 허황된 것이라 할 수 없다. 옥영의 불길한 예감은 2년 후 여름에 현실로 닥쳐왔다.

 1597년 8월, 왜적이 남원에 침략했다. 옥영의 가족을 포함해 마을 사람들은 지리산으로 피난을 갔다. 옥영은 안전을 위해 남장을 했다. 옥영과 가족들은 산속에 피신해 있었고, 최척은 양식을 구하러 잠시 산을 나와 있었다. 왜적은 지리산에 들어와 노략질을 해서 최척은 가족들이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사흘 후, 최척이 피신처로 돌아와 보자, 시체가 쌓여 널브러져 있었다. 최척은 눈이 뒤집혀 시체 더미에서 가족들을 찾았다. 신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여종 춘영이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춘영아, 춘영아!"

"아. 주인님. 가족들이 모두 적병에게 납치되었어요. 저는 몽석 아기씨를 업고 있었는데, 칼을 맞고 쓰러져 아기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춘영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최척은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려 기절하고 말았다. 가족들을 찾으러 강가에 가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서럽게 울다가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최척의 몸을 잡고 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며칠을 굶으며 돌아다니다가 명나라 장수를 만났다. 최척은 중국 말을 조금 할 줄 알아,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중국으로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명나라 장수는 이름이 여유문이었는데, 최척의 사정을 가엾게 여겨, 그를 군사 명부에 넣어 중국으로 데려갔다.

 한편, 옥영과 그의 가족이 왜적에 붙잡혔을 때, 옥영의 어머니 심씨와 시아버지 최숙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왜적이 포로를 노인과 청년으로 구분해 청년 포로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심씨와 최숙이 구걸하며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지리산에 있는 연곡사라는 절에 도달했을 때 절방에서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가 꼭 몽석이 우는 소리 같았다. 방문을 열고 보니, 몽석이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한참 있다가 승려들에게 아이를 어디에서 데려왔냐고 물었다. 혜정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시체더미 속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불쌍하여 데려왔다고 했다. 심씨와 최숙은 손자 몽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리던 종들도 차츰 돌아와 집안 살림을 꾸렸다.

 옥영은 왜적의 장군 돈우라는 자에게 잡혀 있었다. 다행히 돈우는 불교 신자로 살생을 하지 않는 자였다. 그는 장사꾼으로 항해에 능숙하여, 왜장 고니시가 그를 선장으로 데려왔다. 돈우는 옥영이 마음에 들어 그를 잘 대우했다. 옥영은 가족을 잃은 것에 상심하여 여러 번 바다에 빠져 죽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주위에 들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옥영은 근심에 며칠간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어느 날 꿈에 부처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죽어서는 안 된다. 훗날 반드시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 옥영은 꿈에서 깨어난 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음식을 먹으며 훗날을 도모했다. 돈우는 옥영을 나고야로 데려갔다. 또 장사하러 해외로 나갈 때마다 데리고 갔다.  

   이때 최척은 중국의 요흥에 머물며 여유문과 지냈는데, 마침 여유문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최척은 중국의 명승지를 돌아다니다가, 항주의 송우라는 사람을 만났다. 송우는 장사꾼이라 최척에게 같이 장사를 하자고 제안했고, 최척은 이를 받아들여 함께 베트남으로 장사하러 갔다. 그때 십여 척의 일본 배들이 포구에 함께 정박해 있었다. 일본 배에는 염불 소리가 구슬피 들려왔다. 최척은 선창에 기대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다가, 퉁소를 꺼내 슬픈 곡조의 노래를 한 곡 연주했다. 퉁소 소리가 울려 퍼지자 하늘과 바다가 모두 애처로운 듯했다. 갑자기 염불 소리가 끊기더니, 조선어로 된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렸다.


신선이 퉁소 불 제 달은 나지막하고

바닷빛 파란 하늘엔 이슬이 자욱하네.

푸른 난새 함께 타고 날아가리니

봉래산 안갯속에서도 길 잃지 않으리.


이 소리를 들은 최척은 귀를 의심했다. 옥영과 자신만 아는 시였기 때문이다. 최척은 왜선에 다가가 조선말로 물었다. "나도 조선인이오. 타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니 기쁘오. 한 번 만나볼 수 있겠소?" 그 일본 배 안에는 옥영이 타고 있었다. 익숙한 퉁소 소리를 듣고 혹시나 하여 시를 읊은 것인데, 최척의 목소리를 듣자 뱃속에서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둘은 얼싸안고 모래밭을 뒹굴었다. 이별한 지 4년 만에 타국에서 기적처럼 만난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뱃사람들이 나와 부부를 둘러쌌다. 남자 둘이 안고 있어 형제나 친척이라고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부라는 걸 알고 다들 놀랐다. 송우는 돈우에게 옥영의 몸값을 치르고 데려가겠다고 하니, 돈우는 성을 내며 나도 사람인데 이러한 기이한 일을 알고도 몸값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돈우는 옥영에게 은 10냥을 주며 몸조심하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최척은 옥영과 돌아와 중국에 정착했다. 그러나 항상 고향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부친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1년이 지나 옥영은 아들을 낳았다. 둘째 아기 역시 몽석처럼 등에 점이 있었다. 둘째의 이름을 몽선이라 지었다. 몽선이 성장하자, 옥영 부부는 몽선에게 맞는 배우자를 찾았다. 이웃에 진홍도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부친인 진위경이 군대에 들어가 조선으로 간 뒤 소식이 없었다.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홍도는 조선에 가서 부친을 찾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조선인 옥영 부부가 며느리감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그 집과 인연을 맺어 언젠가는 조선 땅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다. 옥영 부부는 홍도의 결심을 듣고는 그 뜻을 좋게 여겨 며느리로 삼았다.

 다음 해 중국에서는 누르하치가 반란을 일으켜 요양 지역을 함락시키고 명나라 군사들을 쳤다. 누르하치는 이후 후금을 세우고 청나라 태조가 된 사람이다. 명나라 황제가 누르하치를 토벌하러 중국 전역에서 병사를 모집했는데, 이때 소주 출신의 오세영이란 사람이 최척이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데려갔다. 최척은 어쩔 수 없이 옥영과 헤어져야 했다. 옥영은 생이별을 다시 겪는 현실이 고통스러워 목숨을 끊으려고 칼을 뽑아 목에 갖다 대었다. 최척은 칼을 빼앗으며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옥영을 달래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옥영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최척이 속한 명나라 군대는 누르하치에게 대패하고, 최척은 청의 포로로 갇혔다. 최척은 자신이 조선 사람이라는 걸 밝히고 조선인 포로들 속에서 지냈다.

 이때 조선은 명나라를 돕기 위해 강홍립을 장군으로 삼아 병사를 보냈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강성하여, 강홍립의 병사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 이때 옥영의 첫째 아들 몽석이 남원에서 병사로 차출되어 강홍립의 군대에 있었고 누르하치의 포로가 되어 최척과 한 곳에 갇히게 되었다. 최척과 몽석은 처음에는 서로를 의심하여 곁을 내주지 않았지만, 며칠이 지나 친해지자 서로를 믿게 되었다. 최척은 몽석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해주었는데, 몽석은 점점 자신이 어릴 적 헤어진 부친의 이야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에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몽석이 최척에게 헤어진 아들의 나이가 몇이고 신체상의 특징이 있냐고 묻자, 최척은 1594년 10월에 태어났고 등에 손바닥만 한 붉은 점이 있다고 대답했다. 몽석은 놀라 한참 있다가 웃옷을 벗고 등을 보이며, 내가 그 아들이라고 정체를 밝혔다.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면서 헤어진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후금의 병사 중 한 노인이 있었는데, 최척 부자가 서로 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조선말로 캐물었다. 최척과 몽석이 사정을 말하자, 노인은 불쌍히 여기며 말했다. "나도 조선인이다. 평안북도 삭주에서 지내다가 고을 부사가 너무 괴롭혀 후금으로 도망 온 지 십 년이다. 너희 사정을 들으니 내가 누르하치에게 질책을 받더라도 놓아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노인은 최척 부자에게 식량을 주며 샛길을 알려줘 도망치게 했다. 최척은 몽석을 데리고 이십 년 만에 조선땅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급히 길을 재촉하다가, 등에 종기가 나서 위독하게 되었다. 은진 땅에 도착해 한 여관에서 목숨이 경각에 걸려 있었다. 마침 그 길을 지나던 중국인이 최척을 보고는, 오늘을 넘겼다면 아마 살릴 수 없었다며, 침으로 종기를 터트리고 소독을 해주었다. 다행히 최척은 병이 나아 남원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부친을 만나 서로 기뻐하며 그간의 일을 말하느라 몇 날 밤을 꼬박 새웠다. 옥영의 모친 심씨도 옥영이 중국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최척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중국인이 너무 고마워, 그를 대접하고 이름을 물었다. 중국인은 자신의 이름이 진위경이며, 집이 항주에 있었고 전쟁 통에 조선에 파병되어 들어왔다가 군법을 어겨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최척은 며느리가 생각나, 혹시 남은 가족이 있냐고 물었다. 진위경은 부인과 딸이 있었는데, 딸의 이름은 홍도라고 답했다. 최척은 진위경의 손을 잡고서 자신이 항주에 살았으며 홍도를 며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최척의 가족과 진위경은 그 인연에 기이해하며, 한 집에서 가족으로 살기로 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전쟁이 한창이라, 항주에 있는 옥영과 남은 가족들을 데려올 방법이 없었다.

 이때 옥영은 항주에 있으면서 명나라 군대가 모두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옥영은 최척이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절망했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하니 그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을 법도 싶었다. 만일 누르하치의 포로가 되었으면 살아있을 것이고, 누르하치의 진이 조선과 가까우니 조선으로 도망쳤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조선에 돌아가, 최척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록 최척이 목숨을 잃었더라도 죽기 전에 고향에 돌아가 남은 친척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옥영은 아들 몽선에게 배와 양식을 준비하라 일렀다. 몽석은 뱃길이 너무 위험하고 해적을 만날 수 있다며 만류했지만, 홍도는 옥영의 말에 적극 찬성하며 남편을 설득했다. 옥영은 일본인에게 잡혔을 적 수년의 항해 생활을 통해 조수를 점칠 수 있고 중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옥영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두 나라 언어를 가르치며 중국인과 일본인의 옷을 각각 만들었다. 또한 몽선에게 나침반을 준비하고 돛대와 노를 견고하게 만들 것을 일렀다.

  2월 초하루 옥영과 몽선, 홍도는 배를 띄웠다. 배 안에는 항해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갖추었고, 나침반을 두어 조선으로 가는 방향을 잡았다. 하루는 명나라의 경비선을 만났는데, 옥영은 중국옷을 입고 중국말로 경비대와 대화했다. 경비대가 어디로 가는지 묻자, 옥영은 산동으로 차를 팔러 가는 중이라 답했다. 다음날은 일본 배가 다가왔다. 옥영은 일본 옷으로 갈아입고 일본어로 답했다. 일본인이 어디로 가는 중이냐고 묻자, 옥영은 고기 잡으러 나왔다가 표류하여 항주 배를 빌려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폭풍우를 만나 돛대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졌다. 풍랑으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몽선과 홍도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옥영은 염불을 외우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날씨가 조금 개자 배를 작은 섬에 대었는데, 갑자기 배 한 척이 다가왔다. 옥영은 몽선을 시켜 배 안에 있던 짐을 굴 속에 감춰두게 했다. 배에 있던 이들이 몰려나와 옥영 일행을 때리며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했다. 옥영은 배 말고 가진 재물이 없다며 살려달라고 빌었다. 해적들은 배만 빼앗아 가버렸다. 옥영은 살 방도가 보이지 않아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지만, 몽선과 홍도가 옥영을 말리며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이틀 뒤 수평선에 돛단배가 보였다. 옷을 흔들자 다가왔다. 옥영은 배의 모양을 보고, 조선 배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뻐했다. 다시 조선옷으로 갈아 입고 선원들이 다가오자 조선어로 대화했다. 선원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묻자, 옥영은 자신들이 조선 사람이고 나주로 가던 도중 풍파를 만나 이곳에 이르렀다고 답했다. 선원들은 옥영 일행을 배에 태운 뒤 순천에 내려주었다. 

  옥영은 몽선과 홍도를 데리고 남원으로 향했다. 가족들은 모두 죽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집터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고향집을 찾아갔다. 집 밖에는 누군가 버드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옥영이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남편 최척이 아닌가! 옥영과 몽선은 울음을 터트렸다. 최척도 놀라 몽석을 부르며 옥영이 집에 온 것을 알렸다. 몽석과 최척의 부친 최숙, 옥영의 모친 심씨, 진위경이 달려 나왔다. 최척은 진위경에게 딸 홍도가 왔다는 걸 알렸다. 온 가족이 다 부둥켜안고 울었다. 옥영은 삼십 년 만에 아들 몽석과 어머니 심씨를 만났고, 홍도는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만났다. 여덟 명의 가족이 전란으로 몇 차례나 뿔뿔이 흩어졌다가, 모진 고난 끝에 다시 만나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     

  옥영의 삶에는 수많은 기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목숨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큰 고통을 겪을 때마다 삶의 의지를 굳게 잡고 고난을 삶의 무기로 바꾸었다. 포로 생활을 통해 중국어와 일본어를 익히고, 그 문화를 배웠으며, 항해술을 익혔다. 그러한 무기들이 가족을 다시 찾는 과정에서 제 역할을 수행했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 남장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중국과 일본, 베트남을 돌아다니며 국적이 다른 이들과 섞여 살았다.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았고, 삶의 뚜렷한 목적을 세우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다. 옥영은 어떠한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삶을 선택하여 가족을 찾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가족을 찾아 함께할 수 있었다. 이산가족의 역사는 17세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분단의 역사로 인해 수십 년 동안 가족의 소식도 알지 못한 수만 명의 이산가족이 존재하고, 이들 대부분은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시간을 넘어 옥영의 용기는 우리의 시대에도 희망을 전해준다. 가족을 찾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삶의 고난을 이겨온 강인한 여성.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집도 절도 없이 친척의 집에 의지해 살면서도, 옥영은 자신의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해 혼인을 성사시켰다. 전란의 고통과 이산의 위기에도 생존의 방법을 터득해가며,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을 지켜나갔다.

 

이전 04화 이옥영 1: 최척과 혼인하기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