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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사 Oct 18. 2019

운영

중세 질서에 대한 고발

운영전은 소설이며, 모두 허구이다. 안평대군이나 성삼문 같은 실존인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작중에 제시된 성격과 대화는 전부 창작된 것이며,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제시되는 등장인물에 대한 서술은, 모두 허구적 주인공에 대한 것이며 실존인물에 대한 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풍류를 즐기기로 명성을 떨치던 안평대군이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한다. “하늘이 남성에게만 재주를 내렸을 리가 없어. 여성도 가르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 거야.” 이 생각이 중세의 남성에게서 갑자기 솟아 나왔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고, 특히 한문은 더더욱 가르치지 않았다. 상층 여성들은 국문을 배워 편지를 쓰기도 했고, 국문으로 된 소설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한문은 장기간의 학습이 요구되기 때문에, 학습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익힐 수 없다. 남자의 경우 가정교사를 통해, 혹은 서당을 통해 한자의 학습이 가능했지만 여성에게는 그러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안평대군은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다. 궁녀 중에 외모가 빼어나고 영특한 여자아이 열 명을 뽑아 가르쳤다. 기본적인 유가 경전을 통해 문리를 깨치게 하고 당시를 가르치니 5년 만에 열 명의 여성 모두 시를 잘 짓게 되었다. 운영은 그 열 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워 안평대군이 내심 마음에 두고 있던 궁녀였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궁녀들에게 시를 가르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통시대 남성은 시 짓는 재주를 이용해 정계에 진출하기도 하고, 글재주를 과시하며 교유의 수단으로 삼았다. 글을 잘 짓는다는 것은, 취향이 고급스럽다는 뜻이다. 취향이 고급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성을 보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글을 잘 짓는 사람일수록 인기가 많았고, 인기가 많은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현대 사회에서는 글 짓는 재주가 반드시 사회적 성공으로 연결되지는 않으며, 사회적 성공에 이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조선 사대부 남성의 경우, 글을 짓는 재주는 사회적 성공을 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수년 동안 과거 준비에 몰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안평대군은 궁녀에게 시를 가르친 후 궁중에 감금하고 외부인과 결코 만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궁녀들이 궁문을 나서거나 외부인이 궁녀의 이름을 알게 될 경우 살해될 것이라 협박을 한다. 그리고 항상 궁녀들을 안평대군 자신의 옆에 머물며 시를 짓게 하고 그 시를 품평하며 시간을 보낸다. 즉 안평대군이 궁녀에게 시를 가르친 이유는, 자신과 대화가 통하는 지적인 노리개를 만들고자 해서였다. 기생에게 시를 짓는 재주를 가르치는 일과 동일하다. 대군의 여성의 지적 능력에 대한 호기심은, 여성이 남성처럼 문재를 이용해 능력을 펼칠 수 있게 하는 방향이 아니라, 풍류와 호기심이 결합된 자신의 변태적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였다. 안평대군은 풍류와 교양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그 이면은 자신의 욕구를 위해 타인을 감금하고 협박하는 독재자이다.

운영전에는 여러 편의 시가 나오는데, 그 시의 기능이 매우 다층적이다. 운영은 시를 매개로 안평대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게 되어 위기에 빠지기도 하고, 궁녀들에게 자신의 마음이 다른 곳에 없다는 점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운영은 안평대군을 찾아온 김진사에게 첫눈에 반했고 상사병에 걸린다. 김진사 역시 운영에게 마음을 두어 식음을 전폐하고 병석에 누워 있었다. 궁녀와 사대부의 사랑은 법으로 금한 것이기 때문에, 발각될 경우 죽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운영은 김진사에게 시가 든 편지를 벽의 구멍 사이로 던지고, 진사는 궁을 출입하는 무녀를 통해 답장을 보낸다. 이때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매개도 역시 시이다. 시를 통해 마음을 감추기도 전하기도 들키기도 하는 것이다.

운영전에는 여성들끼리의 연대가 중요하게 그려진다. 안평대군은 열 명의 궁녀를 둘로 나눠 다섯 명씩 서궁과 남궁에 거처하게 했다. 갈등을 조장하고 서로를 감시하기 위함이다. 추석이면 궁중 사람들이 빨래를 하러 탕춘대에 가서 노니는 행사가 있었는데, 운영의 벗 자란이 이 장소를 바꾸어 궁 밖의 소격서에서 운영과 김진사를 몰래 만나게 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운영이 머물고 있던 서궁의 궁녀들은 장소를 바꾸는 계획에 동의하지만, 남궁의 궁녀들은 장소를 바꾸는 것에 강하게 반대한다. 운영이 외부 남성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점을 눈치챈 궁녀들은 운영을 희롱하는 시를 지어 조롱하거나 비웃는다. 이는 다들 자유를 억압받고 있는 상황에서 너 혼자만 사랑에 눈이 멀어 경솔하게 행동한다면, 그 피해가 우리 모두에게 끼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남궁의 궁녀 중 ‘비경’은 눈물을 흘리며, 운영이 사랑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이해해 줄 것을 호소한다. 다른 궁녀들 역시 그 말에 공감하며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장소를 바꾸는 것에 찬성하게 된다.

추석날 운영은 무녀의 집에 들러 김진사에게 편지를 전하고, 자신을 보러 궁궐에 올 것을 청한다. 편지에는 운영의 과거사와 진사에 대한 마음을 담았다. 운영은 본디 궁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남쪽 지방 출신으로 집 밖 동산에서 아이들과 자유롭게 뛰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열네 살에 왕명으로 가족과 생이별하여 궁녀로 들어오게 된다. 운영은 고향이 그리워 매일 울며 궁중에서 나가길 바랐지만 빼어난 자색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시와 거문고 등에 조예가 깊어질수록 그녀에 대한 안평대군의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다른 궁녀와 궁인들은 모두 운영을 부러워했지만, 막상 그녀는 어린 나이에 구중궁궐에 갇혀 말라죽게 된 처지가 한스럽고 원통했다. 그러한 마음이 넘쳐 꽃을 꺾고 비녀를 꺾는 등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기도 했다. 김진사를 만나기 전 운영은 우울과 불만, 분노조절장애의 증세를 겪고 있었으며, 외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김진사를 본 순간, 운영은 그와 인연을 맺고 잊지 못할 사랑을 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진사 역시 운영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에 궁궐의 담을 넘어 운영과 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궁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궁녀들이 아무리 비밀을 지킨다 한들, 안영과 김진사의 사랑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김진사는 위험을 느끼고 운영과 도망칠 것을 계획한다. 둘이 짐을 챙기며 몰래 도주할 준비를 하는 도중, 안평대군은 김진사를 불러 시를 청한다. 진사의 시 구절에 하필 “담장 넘어 몰래 풍류스러운 노래를 훔친다”는 내용이 있어 대군의 의심을 사게 된다. 진사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며 운영에게 빨리 도망치자고 재촉하지만, 자란은 강하게 둘을 만류한다. 도망을 친다고 해도 추격대에 의해 둘은 곧 잡힐 것이며, 그 피해가 운영의 부모와 궁녀들에게까지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시간이 지나 운영의 미색이 시들 때를 기다린다면, 안평대군의 총애가 줄어들어 궁 밖을 나갈 수 있을 것이며, 그때 김진사와 재회할 수 있으리라 타이른다. 자란의 설득에 둘은 눈물을 흘리며 도망가기를 포기한다.

안평대군은 시를 통해 이미 운영과 김진사에 대한 의심이 커져 있는 상태였다. 대군이 운영을 추궁하자, 운영은 자결로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난간에 목을 매단다. 주변의 궁녀가 운영을 구해 목숨은 건졌지만, 그 이후 김진사는 영영 대군의 궁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운영이 도망치려고 했던 계획까지 발각되어 서궁의 궁녀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곤장을 맞는 형벌을 받게 된다. 자란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감금되어 감정을 자유롭게 나눌 수 없는 상황이 너무도 가혹하다는 점을 토로하며, 운영과 김진사의 사랑을 이어 줄 것을 간곡히 청한다. 대군은 운영을 별당에 가두고 다른 궁녀들은 용서하는데, 그날 밤 운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운영은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벽에 구멍을 뚫어 시를 보내고, 궁 밖으로 나가 김진사를 직접 만나며, 그에게 궁으로 자신을 보러 오라고 요청한다. 도망을 계획하기도 하며, 그 계획이 위험하다는 걸 깨닫자 과감하게 포기한다. 대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기도 하며, 일이 다 발각되자 목숨을 끊는다. 그녀의 죽음이 알려지자 궁궐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친형제를 잃은 듯 서럽게 울부짖었다고 한다. 아름답고 재주가 빼어나 모든 이의 선망이 되었지만, 감정을 숨기고 정욕을 누르며 감금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 만일 발각 후에 대군의 용서를 받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운영은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이다. 중세의 질서는 넘치는 풍류와 고아한 교양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으나, 그 이면은 약자를 억압하고 감정을 제어하며 자유를 구속하는 기괴한 감옥이었다. 운영의 죽음은 중세의 허위와 포장을 벗겨내며, 그 부조리의 실상을 고발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안평대군의 수성궁은 이백 년도 지나지 않아 담장은 무너지고 초목만 무성하며 인적이 드문 폐허로 변해버린다. 완벽해 보이던 그 세계는 왜 그토록 빨리 폐허가 되어 버렸을까? 권력을 이용해 타인을 억압하고 구속하며, 자신의 기쁨을 위해 약자를 노리개로 삼는 자가 다스리는 세계는 망해도 싸다. 여성에게 친화적인 듯 포장하고, 여성의 재주를 인정하는 것처럼 위장한 안평대군은 몰락하고 궁궐은 주인을 잃었다. 폐허만 남은 수성궁이 아직도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오직 그 공간에 운영과 김진사의 사랑이 존재했던 곳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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