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사 Oct 18. 2019

바리데기

남아선호 사상에 대한 반역

“바리다 바리덕이, 던지다 던지덕이” 버린다는 뜻에서 “바리”, 던진다는 뜻에서 “데기”, 태어나자마저 버려진 저주받은 아이, 바리데기는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에서 고통받은 수많은 여성을 대표하는 존재다. 바리데기의 아버지인 오구대왕은, 바리데기 위의 여섯 딸은 금지옥엽으로 키우지만 일곱 번째 딸인 바리데기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분노를 쏟아낸다. 대체 왜 그랬을까? 아들에 대한 기대,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여섯 번의 거듭된 실망이 한데 합쳐져 갓 태어난 죄 없는 아이에게 향한 것이다. 그런데 왜 딸만 낳게 된 것일까? 오구대왕은 길대부인에게 반해 곧바로 혼인하려 하지만, 점쟁이는 1년을 더 기다려 혼인을 하면 세 아들을 낳을 수 있고, 바로 혼인한다면 일곱 딸이 태어나리라 예언한다. 그 예언을 무시하고 오구대왕은 길대부인과 혼인을 한다. 그리고 여섯 딸이 태어난다. 즉 딸만 태어난 이유는 예언을 무시해 혼인을 서두른 오구대왕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도 오구대왕은 자신의 잘못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일곱 번째 딸을 태어나자마자 버리게 한다. 딸을 낳은 직후 갈대부인은 땅을 치고 서럽게 울며, 오구대왕은 정신을 놓을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종묘사직 위패와 옥새를 맡길 대상이 사라졌으며, 오매불망 바라던 아들에 대한 소망이 끊어진 것이다. 대왕은 그 책임을 모두 바리데기에게 지워 유기를 명하고 있다. 바리데기는 출생부터 부모에게 상실의 슬픔을 주고 증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간난아이를 버리라는 오구대왕의 어명은 아기를 죽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마구간에 버려 말굽에 밟혀 죽든지, 소에 깔려 죽게 하려고 했는데, 소와 말은 바리데기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 물에 넣어 익사하게 하였더니, 물에 떠서 가라앉지도 않는다.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 보기 싫어 깊고 깊은 산속 동굴 속에 갖다 버렸다. 이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바리데기를 유기하는 과정은 대개 매우 잔인하게 묘사되고 있다. 버려진 아기 입에 불개미가 가득하고 아기 눈에 왕개미가 가득해도, 죽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자 속에 넣어 강에 던져버린다. 하늘이 돌려보내고 땅이 돌려보내도, 반복해서 유기하여 눈앞에서 지워 버린다. 자연이 막으려 해도, 하늘이 막으려 해도 부모의 의지, 인간의 의지에 의해 딸은 버려지며, 그 과정은 아무리 잔혹하더라도 상관없다. 길대부인은 호랑이가 바리데기를 물어가도 뜯어먹겠거니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오고 오구대왕은 아이를 버렸다는 말을 듣고 속 시원해하며, “그거 잘했다. 딸이 너무 몸서리나고 보기도 싫고 음성도 듣기 싫으니 잘 갖다 버렸다”라며 환영한다. 남성들이 만든 인륜과 도덕은 아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인가. 조선의 여성은 미움을 받는 존재이자, 학대의 대상이다.

조선의 지배사상인 성리학은 남존여비 관념을 강화시켰고, 아들만을 대를 이을 수 있는 존재로 인정했다. 출생부터 성별로 인해 부모의 기대를 어그러뜨린 조선의 딸들은 유가 사상이 반갑지 않다. 그녀들은 성리학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남성 사대부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이면을 폭로하고 고발한다. 무교를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그리고 불교와 도가를 통해서. 유가 사상을 제외한 모든 신적 존재가 바리데기를 보호한다. 산신령과 석가세존이, 소와 말과 쌍학과 호랑이가, 하늘과 땅이 그녀를 지켜내 아이가 없는 노부부에게 바리데기의 양육을 맡기는 데 이른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는 존재들, 그리고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존재들이 바리데기를 호위하고 있다.

부모와 친족에게, 시가와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고통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딸들은, 천지신명과 신적 존재를 마음속으로 의지하며 하루하루 버텼으리라. 바리데기는 건강하게 자라 교육을 받는다. 글을 익히고 하늘에서 병서가 내려와 그 책으로 공부를 한다. 산신령이 책방을 만들어준다. 왜 바리데기는 공부를 하고 글을 배우는 것일까? 조선 사회는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글을 배우는 일은 지식을 습득하고 생각을 확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글을 아는 조선의 여성은 그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겨 숨기고 글을 못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책방은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며, 병서는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학문이다. 바리데기가 성장하며 십 년 이상 공부하는 설정은 당시 여성들이 허락되지 않은 배움과 학문에 대해 갈급했던 심정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들도 글을 배워 책을 통해 수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학문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고 싶었으리라. 허락되지 않은 배움에 대한 욕망은, 바리데기의 성장과정에서 표출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글과 책을 통해 바리데기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부자유친”을 배우며, 아비를 찾고 “아버지 날 낳으시며”를 암송하며 그를 그리워한다. 양부모는 거듭된 바리데기의 질문에 왕대나무와 머루나무(또는 오동나무)를 바리데기의 아비와 어미라고 답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짚는 지팡이를 대나무로 만들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상주가 짚는 지팡이를 머루나무로 만들기 때문이다. 너의 친부모가 이미 죽었다는 답을 한 셈이다. 바리데기는 왕대나무와 머루나무를 찾아가 삼시 문안을 드린다. 친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표출이다.

바리데기가 성장한 즈음에 오구대왕이 병에 걸린다. 폐결핵이라는 말도 있고 술병이라고도 하며, 칠공주를 버린 천벌이라고도 한다. 어떤 약도 어떤 의원의 처방도 듣지 않는다. 점쟁이 말에 따르면 칠공주를 찾아 그의 힘으로 얻은 약수를 마셔야만 병이 낫는다고 한다. 금지옥엽 키운 여섯 딸들은 각각 자기 사정이 있다며 약수를 찾아오라는 대왕의 부탁을 거절하고, 충성을 다한다던 수많은 신하도 약수를 찾으러 가겠다는 사람이 없다. 그제야 대왕은 바리데기를 찾아오라 한다. 이본에 따라 길대부인이 찾으러 가는 경우도 있고, 신하가 찾으러 가는 경우도 있다. 길대부인이 가는 경우에는 바리데기가 유기되었을 때 입혔던 옷과 그 옷에 쓰인 글자가 친자의 단서가 되어 모녀 상봉을 하고, 신하가 찾으러 간 경우에는 바리데기와 대왕의 피를 합하여 친자확인을 하고 궁궐로 돌아온다. 바리데기는 엄마의 젖 한 모금 빨아보지 못하고 엄마의 품에 안겨보지 못했던 한을 토로한다. 눈물의 상봉 장면은,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딸들의 슬픔이 표출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리데기의 슬픈 운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부모를 상봉하면 그동안 못 받았던 사랑을 충분히 받고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겠지만, 부모가 바리데기를 찾은 이유는 바리데기가 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병이 낫고 싶어서였다. 바리데기가 보고 싶었더라면, 병이 나기 전에 찾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존재, 자신의 꿈을 망가뜨려서 증오했던 존재가,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찾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현대의 독자들은, 오구대왕이 바리데기를 버렸을 때 분노하고, 다시 찾을 때 다시 분노한다. 부모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식의 가치를 결정하고, 유기와 재회를 결정할 권한을 갖는다는 것에. 자식은 자식의 삶을 살아가고, 자식의 욕구대로 행동하는 현대 사회의 독자들은 바리데기가 이토록 쉽게 부모를 용서하고 부모가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해할 수도 있다. 바리데기는 부모를 비난하지 않으며, 심지어 부모를 위로하고 자신이 약수를 찾아오겠다고 한다. 세상에 없는 착한 딸이 세상에 없는 효를 실천하고 있다. 자식에게 무한대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며, 이를 부모라는 이유로 정당화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딸을 버린 오구대왕이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설정은, 남존여비와 남아선호 사상으로 굳건히 세워진 세계가 더 이상 지탱해 나갈 수 없으며, 멸망할 수도 있는 위기에 놓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버려진 딸의 가치를 발견하고 딸의 원한을 풀어주며 딸의 힘에 의지하는 것뿐이다.

약수는 서천 서역에 있는 것으로, 살아서는 아무도 가지 못하는 저승세계의 보물이다. 목숨을 거는 것은 기본이며, 어떤 인간도 그곳에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바리데기는 남장을 하고 길을 떠나며, 밭 갈고 빨래하는 노동을 대가로 서천 서역국을 가는 길을 찾게 된다. 그 노동이 바리데기의 힘으로는 너무도 어려워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여러 신적 존재의 도움을 받게 된다. 석가세존의 육환장을 얻어 위기를 극복하기도 하고, 마고할미를 만나 길을 찾기도 하며, 하늘에서 내려준 수많은 동물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인간에게 버려졌지만, 멸망의 위기에 있는 인간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바리데기는 쉬지 않고 노동을 수행한다. 그 결과 서천 서역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길을 찾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밭 갈고 빨래하는 여성의 일상적 노동이었다. 이는 매일 수행하는 여성의 노동이, 비록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하찮게 인식되고 있을지언정, 바로 그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비록 서천 서역국을 찾았지만 바리데기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서천 서역국의 약수를 지키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무장승, 또는 동수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무장승은 이름에서 민간신앙의 대상임을 알 수 있고, 동수자는 천상계 사람으로 죄를 지어 인간 세상으로 떨어진 존재이다. 무가나 도가 사상의 신적 존재라 하겠다. 바리데기가 무장승에게 약수를 청하자, 그는 물 값을 요구한다. 가져오는 걸 잊었다고 답하니, 낫 없는 손으로 나무 삼 년, 불씨 없는 불 삼 년, 밑 빠진 독에 물 삼 년을 길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9년을 노동하니 바리데기의 손은 갈퀴처럼 변해 버린다. 그에 더해 무장승은 아들 일곱을 낳아달라고 요구한다. 바리데기는 부모를 위해 아무 불평 없이 9년의 노동을 수행하고 일곱 아들을 낳아 키운다. 그제야 무장승은 약수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는다. 바리데기가 그동안 길었던 물이 바로 그 약수이고, 일하던 공간에 있던 꽃이 뼈를 살리는 꽃이라고. 바리데기가 물과 꽃을 들고 궁궐로 돌아가려 하자, 무장승과 일곱 아들이 모두 바리데기의 뒤를 따른다.

바리데기가 궁궐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망자를 태운 두 척의 배를 만나게 된다. 한 척은 살아 있을 때 선을 쌓아 극락 가는 망자들이 탄 배로 화려하고 풍악이 울렸으며, 다른 한 척은 생전에 제 욕심만 채우다가 지옥에 가는 망자들의 배로 바닥이 없고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바리데기는 눈물을 흘리는 망자들의 고통을 보고 죽은 넋이나마 편안하게 해달라고 빈다. 바리데기는 영아 시기 유기되는 고통을 겪고 부모를 위해 온 인생을 바치는 고된 삶을 사는 과정에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특히 죽은 자들의 한을 푸는 일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여성이라는 존재에서 비롯된 차별과 과도한 노동은, 전통시대 하층 여성의 보편적인 삶의 양상이다. 이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꿈꾸지 못했고, 부모가 시키는 대로 얼굴도 보지 못한 이와 결혼하여 농사와 집안일, 출산과 육아에 따른 노동을 어떤 불평도 없이 수행해야 했다.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이름 없이 사라진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을까?

바리데기가 수도에 도착했을 때 대왕의 상여 행차가 막 나가고 있었다. 바리데기는 약수와 꽃을 사용해 대왕을 살린다. 대왕이 나라의 반을 주겠다고 하지만, 바리데기는 이를 거절하고 망자의 혼을 위로하는 만신이 되겠다고 한다.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 저승의 신이 된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과 과도한 노동을 견디는 이유를 찾고자 했고, 그 고통과 노동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힘을 발견했으며, 공동체의 위기를 고발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성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고,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며, 여성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여성을 계속 차별하고 학대한다면, 이 사회가 멸망의 위기에 빠질 것이며, 그 사회를 구원하는 길은 오직 여성의 힘에 달렸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바리데기는 전통시대 일상을 살아간 수많은 하층 여성을 대표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고통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고된 일상을 버텨내는 이유를 찾고 싶을 때 나는 바리데기를 생각한다. 나 역시 언젠가는 타인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그리고 나의 노동이 쌓여 이 사회를 떠받치는 하나의 손이 되기를.

이전 01화 여성문학을 찾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