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상이 조금 번잡스러웠다. 나답지 않게 약속이 많았다. 밥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출퇴근 외엔 외출 자체를 싫어하는 난데, 어쩌다 보니 주말이 꽉 차 있었다. 어느 주는 출근을 했고, 어느 주는 시댁을 갔으며, 어느 주는 아들 친구들이 하루 종일 놀다가 잠까지 자고 갔고(우리 집 천장 아래긴 했지만 내가 거실에 누울 수 없으면 그건 외출이다.) 어느 주는 친정, 또 어느 주는 누군가의 송별회를 가야 했다.
원래의 나라면 이렇게까지 여백이 없는 일상을 못 버텨내는데 이번에는 괜찮았다. 아무렇지 않게 잘 버텨내었다. 심지어 진심으로 즐기며 웃었던 순간도 있었고, 즐거워하는 주변을 보니 적당히 사람 된 도리를 한 것도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 쉽게 지치고 닳기 때문에 혼자 있길 좋아한다. 나의 이런 성향은 MBTI라는 것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도덕성과 결부되어 비난받기 일쑤였다. 어릴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애라며 자주 혼이 났었다.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조심하고 피하면서 살아가는데도 개인주의자라는 다그침과 함께 성격 고쳐야 한다는 소리를 종종 들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선 남편에게 부부동반 모임 같은 거에 나가고 싶어도 나 때문에 못 간다는 원망을 듣기도 했다. (이제는 남편도 진작 포기한 듯 하지만)
나쁜 놈이 천지인 세상인데, 그저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남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는다 하여 비난받아야 되는 것이 이상했다.
아니, 나는 누군가의 불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행복을 바라고 있는데? 그저 안물안궁 했을 뿐인데? 그것도 죄라면... 좋소. 돌을 던지시오~ 그게 정말 죄라면...... 돌 맞아야지.
그런 종류의 억울함을 품고 살아왔던 것 같다.
MBTI가 유행하면서 I라는 성향이 성격의 한 분야로 인정받고 있어 얼마나 행복하던지.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는 것도 외출인 나는, 그냥 평생 이렇게 외길 인생, 대문자 I, 궁서체 I, 파워 I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조용히 마음속으로 주변의 무탈과 지구의 평화와 북극곰의 안녕을 바라며 살아가고 싶다.
그런 나였다.(...... 고 한다,라고 남일처럼 말하고 싶네, 진짜)
그런 내가 그렇게나 지난한 주말들을 꾸역꾸역 삼키며 버텨내길래,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지난달에 받아온 약을 다 먹어버려 병원을 가야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정말이지 조금 바빴다. 지난 금요일부턴 아예 약이 없어 먹지 못했다. 비상시에 먹는 '필요시' 약만 몇 첩 남아 있어 그 약만 두어 번 먹었던 거 같다. 그 외엔 아침저녁 약을 3일 정도 안 먹었는데도 몸과 마음 모두에 이상이 없었다. 무탈했다. 정상인(?)처럼 외출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아무것도 아닌 날들을 보내었기에 '이제 이 정도의 주말은 버텨낼 수 있게 되었구나. 아, 그럼 드디어 약을 줄일 때가 왔나 보구나.' 생각했다.
'필요시'약을 손에 쥔 채 몇 번이고 먹을까 말까를 망설였지만, 사실 그 필요를 알 수가 없었다.
이쪽 약은... 진통제 같은 약이 아니라서 약효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약을 먹어서 좋아진 것인지, 주변 상황이 좋아진 것인지, 내 몸과 마음 어딘가가 좋아진 것인지. 도통 그 인과관계를 알 수가 없다.
어떤 상황이 '필요'시 인지, 정말로 '필요'했는지, 그렇다면 그 '필요'가 충족되었는지. 그걸 알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며칠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았으니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약을 줄여보고 싶었다. 점점 약에 의지하고 있는 내가 느껴져 이제라도 조금 멈춰야 하나 싶었다.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준비했던 말을 쏟아내었다. 선생님께서 반가워하며 "여어~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셨는데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채(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정말이지 멀티가 안 되는 인간이라 그럴 뿐이다.) 준비했던 말부터 와다다 쏟아내었다.
3일 동안 약을 먹지 않았는데요, 괜찮았어요. 심리적으로도 문제가 없었고, 숨 쉬기 힘들었던 적도 없었어요.
약을 줄여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오늘 말해야지, 다짐하면서 대기실에 앉아 있었더니 그때부터 조금 숨이 차긴 했는데 아마도 그건 긴장해서 그런 거 같고 일단 며칠 진짜로 괜찮았어요.
선생님께서 멍~한 표정을 지으시다가, "괜찮다는 말일까요? 아니라는 말일까요?"라고 물으셨다.
괜찮죠, 괜찮다는 말이죠. 아주 괜찮아요. 오늘 진료 때 이 말을 해야지,라고 내내 생각하는 바람에 조금 긴장해서 그런 거고요... 일단은 괜찮다는 거죠. 지금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을 10번쯤 한 것 같다.
"그럼 약을 줄여볼까요?"라고 하셔서... 그제야 조금 놀래서 아! 잠시만요, 했다. 선생님께서 진짜로 약을 줄이려고 하자, 갑자기 겁이 난 것이다. 약 없이 밖에 나가도 되나, 내가? 불안했다.
약을 줄이면 진짜로 괜찮을까요? 아, 그러니까, 숨 쉬는 거 말고요... 선생님.... 제가 숨 쉬는 게 힘들기 전엔 아마도 대인기피증이 좀 있었던 거 같거든요. 사람을 만나기 싫은데 만나야 하는 스스로의 상황에 굴욕감을 느낄 정도였어요. 그걸 참다가 결국 숨이 안 쉬어졌던 거 같아요. 약을 줄이면 다시 그렇게 사람 만나는 게 힘들어질까요? 약 없이 밖에 나갈 수 있을까요?
선생님께선 살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말씀하셨다.
그동안 약을 잘 먹어왔으니 많이 나아졌을 거예요. 그리고 **씨도 많이 달라졌고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편안해졌을 거예요. 일단은 줄여보고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이런 질문을 했다는 거 자체가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는 걸까.
그렇지만, 어차피 필요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필요도, 필요시도, 그 상황이 닥치기 전까진 알 수가 없는 것이라 과연 필요할까, 궁금했다. 정말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렇게, 약을 줄이기로 했다.
원래 이 글의 제목은 '약을 줄이기로 했다'였다.
연재 날짜 같은 건 이미 지키고 못하고 있지만 어쨌든 노력 중이긴 해서, 작성한 날짜와 연재일이 달라 저장만 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고작 그 며칠 사이에 상황이 조금 변해버린 것 같다.
약이 세 알이었는데 두 알로 줄었다. 내가 먹는 약들이 전부 뭐냐고 물었을 때 선생님께선 신경안정제, 항불안제, 공황장애약이라고 하셨다. 그중에 뭐가 줄어드냐고 물었더니 하나를 완전히 빼버리진 않을 거고 조금씩 양을 줄일 거라고 하셨다. 집에 와 살펴보니 아침과 저녁 약의 구성이 달라졌고 숫자도 줄었다.
어쩌면, 나를 지켜주던 무언가가 줄었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불안했던 것도 같다. 그 불안함만큼 내가 약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뜻일 테니 이번에는 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했었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약을 줄였던 첫날부터의 스스로를 계속 복기해 보는 중이다.
첫날은 길이 험한 곳에서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크게 날 뻔했다.
둘째 날은 아들 학원에서 전화가 왔었다. 아들의 학습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아들과 친해진 후로 성적이 떨어진 다른 아이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셋째 날은, 남편이 크리스마스 때 어머니와 밥을 먹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넷째 날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되지도 않았네. 약을 줄이기 전 3일 동안은 약을 먹지 않았고 그 이후 3일 동안은 약을 줄였을 뿐이다. 그런데 왜 벌써 이런 상태가 되어버린 걸까. 나의 컵은 여전히, 이렇게나, 쉽게 넘치고 마는 걸까. 아무것도 담아내 지를 못 하나.
약을 줄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모든 숙제를 마쳤을 때의 여백 속에서 홀가분함을 느끼던 중이었다. 숙제를 무사히 마친 스스로가 기특하고 장했다. 그 상으로 연말까지는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필요시'약을 삼켜가며 외출을 하고 정상인처럼 잘 버텨냈으니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최소한 연말까지라도 텅 빈 일정들을 생각하니 마음속에 산들바람이 부는 듯 고요하고 시원했는데, 그 여백에 무언가가 하나씩 하나씩 끼어들더니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외출까지 끼어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검사보고서에선 '역치를 넘어서면'이라고 표현했던 걸까. 근데, 그게 이렇게 쉽게 넘어서는 것이 맞나.
남편이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꺼내며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말한 거 같은데."라고 하길래 너무 당황해서 "초면인데?"라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외출이나 어머니를 만나는 일에 대해선 절대 허투루 듣지 않는다. 숙제에 대해선 언제나 정확하게 듣고 마음에 새겨 넣는다. 가끔은 칼로 긋는 기분으로 새겨 넣기도 한다. 해야만 하는 숙제. 누가 뭐라 해도 그건 내게 숙제다. 그냥 눈 딱 감고 버텨야 하는 시간들이다. 모든 순간이 싫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순간이 쉽지도 않다. 집 밖에 나가는 일은 여전히 버겁다. 남편 때문에 늘어난 대출금만 아니라면 그저 집에만 있고 싶은 날들인데, 내가 약을 줄여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여 정상적인 외출을 해야 한다면 나는 그냥 평생 미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 사람이라면 누구도 나를 찾지 않을 테니 오히려 편할지도 모를 일이다.
밖에 나가야 하는 순간의 선택권은 나한테 있었으면 좋겠어.
개처럼 목에 목걸이 채워 끌고 나갈 거면 그렇게 해. 대신 나는 이번엔 진짜로 죽어버릴 테니.
그 정도의 기본적인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안 살아도 될 것 같아.
이 모든 다짐과 선언들이 모두 한 순간에 일어났다. 약을 줄여보겠다는 의지를 밝힌 지 단 며칠 만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이다. 나가자고 하면 진짜로 죽어버릴 거야,라는 말을 남편한테 하며 울어버렸다.
남편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잘 모르겠지만, 사실 알 것도 같다. 저런 말과 저런 울음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그 말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도 허술하고 빈약하다. 크리스마스 때 시어머니와 밥 한번 먹자 했다고 하늘이 무너진 듯한 절망을 느끼며 죽어버리겠다는 아내를 보는 남편은 무슨 심정일까. 우리 남편도 참 불쌍하다. 남편은 내가 약을 줄이겠다고 했을 때 내가 괜찮은 줄 알았을 것이다. 나조차도 그랬으니 말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어머니와의 약속을 덜컥 잡아버린 것이겠지.
어머니는 다정하고 좋은 분이시다. 드라마나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 등장하는 표독스럽고 욕심 많은 그런 시어머니가 아니다. 내 주변의 그 누구보다 정이 많고 따스하다. 다만, 외로움으로 가득한 눈빛이 너무 시려서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올 때면 늘 숨이 찬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그 허기가 너무도 강하여 매번 눈물이 날 것 같고 그 앞에선 늘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아니, 어머니뿐만이 아니다. 내겐 대부분의 약속이 그렇다. 내가 줄 수 없는 걸 필요로 하는 눈빛과 마주치게 될까 봐 언제나 두렵다.
나는 가진 것이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으며, 가질 수 있는 것도 없다. 주고 싶은 것도, 받고 싶은 것도 역시나 없다. 그리하여 허기진 눈빛과 마주한 날은 그날 하루 치의 내가 온전히 닳아 없어지는 것만 같다. 그럴 때면 꽤 오래 아파야 한다.
아직은 나가고 싶지 않다.
내가 선택한 순간에 내 의지로 밖에 나가고 싶다.
이런 맘을 몇 년 동안 모른 척하며 그저 누르고 버티다가 이렇게 돼버렸는데, 이게 뭔지 알아버린 이상 이전처럼 그렇게 버티고 싶지 않다.
집 밖에서의 나를 도와줄 무언가가 없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나가야 한다면, 더 살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에 부들부들 떨며 씩씩거리고 있는 중인데, 사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헛소리 같아서 또 한편으론 이런 내가 너무 수치스럽다. 왜 여전히 제자리일까. 언제까지 여기 서서 이러고 있을까.
여기까지 써 놓은 글을 가만히 읽어본다. 이게 남의 글이었다면 '뭐야... 정신병자네?' 했을 것 같은데 내가 쓴 글이라 꾹 참고 바라보는 중이다. 지난여름부터 써 왔던 글도 다시 보는 중이다. 대체 그동안 뭘 느껴왔고 뭐가 변한 걸까. 이럴 거면 발리까진 왜 다녀온 걸까. 길리에서 동쪽과 서쪽을 오고 갈 때 분명히 앞으로의 나는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 순간의 나는 어디로 증발해 버린 걸까.
선생님은 그동안 나도 달라졌을 거라고 하셨는데... 아니요, 선생님, 이번엔 선생님이 틀리셨네요. 저는 여전히 병신이고 말씀하셨던 그 컵은 며칠 사이 산산조각 나버렸나 봐요.
어쨌든, 지금은 이게 나고, 아마도 지금이 바로 그 '필요시'인 것 같고, 나는 아직 약을 줄여서 될 때가 아니구나,라고 깨닫는다.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틀렸다는 건 너무 잘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정신병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이나 들어야 할 소리임을 알고 있는데, 진짜로 아는데, 정말로 다 아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 슬프지만, 덕분에 또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아직 멀었나 보다.
여전히 나는, '필요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