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늘 죽을 뻔했어. 그런데 안 죽었어. 그게 너무… 기쁘고 슬퍼."
하지만 최준석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목을 조르는 괴한을 피하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타박상을 입었다. 그는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모니터링 줄을 끊어 비상벨을 울려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병실로 달려왔을 때 그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침입자의 존재는 연기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병원 보안팀에서 CCTV를 확인했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한 채 또다시 미궁에 빠졌다. 최준석이 유일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였다.
병동 복도에 서 있는 희주를 발견한 동료 형사가 곧 오치상이 온다면서 경고했다. 희주는 간호사에게 부탁해 병실에 설치한 감시 카메라를 받아 냈다. 희주는 영상 확인을 위해 오피스텔로 향하면서 무원에게는 상황을 좀 더 살펴본 뒤 오피스텔로 오라고 지시했다.
“네가 있어서 든든해. 나 혼자서는 이 수사 못 했을 거야.”
“웬일이에요, 그런 말을 다 하고.”
“몰라. 죽을 때가 됐나?”
희주는 걸어서 10분 거리인 오피스텔로 향했다. 1층에는 호프집, 식당이 성업 중이었다. 1층 비상구 계단을 걸어 2층 복도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은은한 곰팡내와 음식 냄새가 났다. 침침한 형광등이 하나 걸러 하나씩 켜져 있었다. 아마도 공용 전기요금을 아끼려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잠시 잠깐 하는 사이 휴대폰이 울렸다. 희주는 복도 제일 끝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복도에 선 채 전화를 받았다.
“안상호 경위입니다.”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뇌 어딘가 저장되어 있던 ‘안상호’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부임한 첫해 마을 저수지에서 별장 가사도우미가 빠져 죽은 사건을 목격한 신참 형사. 희주의 번호를 지웠을 거라는 예상이 깨졌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혹시라도 가족들에게 해가 될까 싶어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경위님께 들은 이야기는 수사에 참고만 하고 정식 증거로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증거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 서류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제가 전부 불태웠으니까요. 윗선을 통해 그렇게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시대로 했으니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 압니다.”
희주는 말없이 20년 전 일을 고백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상구 문을 닫고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그날 본 시신과 여자의 인적 사항은 잊혀지지 않더군요. 껌처럼 뇌에 딱 달라붙어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수없이 많은 사건을 접했지만, 유독 그 사건만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희주에게 죽은 여자의 이름과 당시 주민등록상 거주지 등 기억하는 것들을 전부 털어놓았다. 희주는 휴대폰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제야 꽉 막힌 수사에 도움이 될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았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집까지는 고작 5미터 앞. 희주는 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통화할 생각에 현관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침침한 형광등이 꺼지면서 일순간 복도가 어둑해졌다. 그리고 누군가 희주의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우고 입구를 조였다.
산소 부족보다 먼저 극도의 공포심이 덮쳤다. 순간적으로 감시 카메라가 든 가방을 복도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괴한은 가방에는 관심 없는 듯 비닐봉지로 감싼 희주의 목을 가차 없이 졸랐다. 괴한의 엄지손가락이 점점 더 깊게 목을 파고들었다. 괴한의 숨소리가 가깝게 들리자 배 속의 모든 걸 게워 낼 수 있을 것 같은 욕지기가 밀려왔다.
‘침착해. 패닉에 빠지면 그땐 정말 끝이야.’
희주는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길 바라면서 발을 뻗어 벽과 문을 찼다. 제발 한 명이라도 듣고 문을 열어 주기를. 활짝 열린 입과 콧속으로 침으로 축축해진 비닐이 말려 들어왔다. 희주는 괴한의 팔을 잡았던 손을 풀어 마구 휘둘렀다. 남자의 차가운 벨트 버클이 손등에 느껴지자 소름이 돋았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현실이라는 완벽한 자각. 땀으로 젖은 상체와 마구 버둥거리는 희주를 버티려는 단단한 하체 근육도 느껴졌다. 괴한의 운동화와 바닥이 마찰하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한낮의 오피스텔은 너무나 고요했다.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괴한은 한 번 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가, 희주를 놔주었다.
희주는 그 자리에 끈이 잘린 마리오네트처럼 쓰러졌다. 물에 빠졌다가 죽기 직전에야 뭍으로 올라온 기분이었다. 몸을 덜덜 떨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빠르게 복도를 달려 비상구로 사라지는 괴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검은 실루엣이 비상구 문을 열고 사라졌다. 격렬하게 몸이 떨렸다. 차가운 복도에 얼굴을 대고 누워 있는데 다시 비상구 문이 열렸다. 혹시 범인이 돌아온 걸까.
“선배!”
무원은 희주를 발견하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희주를 안아 일으켰다.
“방금 내려갔어. 빨리 확인해 봐.”
무원은 희주를 복도에 기대 앉혔다. 그리고 재빨리 비상구로 향했다.
공황발작이 찾아오지 않은 게 신기한 지경이었다. 목구멍으로 눈물과 콧물, 비릿한 피가 넘어갔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범인은 사라졌다. 애초에 희주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경고’만 하고 사라졌다. 마치 희주가 뭘 알게 되었는지 아는 것처럼. 저수지에서 죽은 여자 이름을 알게 된 것과 동시에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게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딱 맞아떨어졌다. 희주는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피가 섞인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앞을 보는 데는 문제없었다.
무원이 비상구 문을 열고 다시 희주가 앉아 있는 복도로 달려왔다.
“1층에 감시 카메라가 한 대 있는데 고장 났어요. 관리인은 언제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있고요. 일단 병원으로 가요.”
“최준석 병실 영상 확인이 먼저야.”
“제정신이에요? 지금 죽을 뻔했어요.”
“아냐. 날 죽일 생각은 없었어. 경고성 기습이야. 그건 우리가 진실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는 의미야. 내 목을 조른 남자는 최준석의 병실 감시 카메라가 든 가방에는 관심이 없었어. 그럼 거기까지는 아직 못 따라잡았다는 거야. 방금 전에 안상호 경위에게 전화가 왔어. 경위는 죽은 여자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어. 그 사람, 20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여자 이름을 잊지 못했어. 왜겠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거야.”
“알겠어요. 설명은 나중에 해요. 선배를 혼자 보낸 내 잘못이에요. 우선은 병원에 가요.”
“이 사건만 해결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아.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은 그 일도, 공황발작도 전부 말이야. 새 출발 할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돌겠네요, 정말. 그럼 내가 뭘 해 주면 돼요?”
“같이 영상을 보는 거야. 그 영상에 누가 나오는지 확인해 보자고.”
무원이 감시 카메라 영상을 노트북에 옮기는 동안, 희주는 화장실에서 괴한의 흔적이 남았을 가능성이 있는 옷을 증거물 봉투에 챙겼다. 얼굴을 감쌌던 비닐봉지를 다시 만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도 증거물이었기에 챙겨 두었다. 희주는 거울을 응시했다. 오른쪽 눈썹 위의 흉터가 채 아물기도 전에, 목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팔뚝에도 멍과 상처가 생겼다. 몸 어딘가에 범인의 흔적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당장 뜨거운 물로 씻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빌어먹을 새끼…….”
희주는 소파에 앉아 있는 무원 옆에 앉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약을 한 알 먹었다. 아직은 무너져서는 안 된다. 아기를 때려 죽게 만든 남자가 여전히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아기는 죽었고 아무도 아기를 찾아오지 않았다. 선한 간호사들은 분유와 아기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아기와 함께 태웠다. 선과 악이 극명하게 공존한다. 그 사이에서 선한 이들을 지키는 것이 형사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쓰러질 때가 아니다.
“병원은 어때? 현장에서 뭐 나온 건 없었어?”
“아직은 없어요. 감시 카메라 확인하고 목격자 찾고 있어요.”
“영상 틀어 봐.”
최준석은 잠들어 있었다. 페이션트 모니터에서 불빛이 흘러나와 그의 얼굴을 비췄다. 잠시 후, 뭔가 불편한 듯 상체를 들썩였다. 시트 속에서 왼손을 뺐다. 그리고 신경 접합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왼손으로 스스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대체 뭐 하는 거지?”
최준석은 괴로워하며 목을 조르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움켜쥐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왼손은 쉽사리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목을 졸랐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제 손을 떼어 내려 애를 썼다. 몸이 점점 더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오른손은 왼손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그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왼손 대신, 오른손으로 페이션트 모니터에 달려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줄이 빠지면서 비상벨이 울렸다. 그리고 나서도 목을 조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간호사가 달려 들어와 최준석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젠장! 최준석을 공격한 건 본인 자신이야. 범인이 아니었어. 이게 가능한 일이야?”
“그럼 설마 자택에서의 기습도 자작극일까요?”
“확실하진 않지만 왼손 손목 신경이 끊어지고 오른손은 유리에 베인 상처가 가득했잖아. 그렇다면 자신을 공격하려는 왼손을 오른손이 저지하려다가 상처를 입은 걸지도 몰라.”
“하지만 이걸 연기라고 보긴 힘들어요. 진짜 공격받은 사람 같잖아요.”
“우리끼리 볼 영상이 아니야. 전문가한테 물어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희주는 주웅의 이메일로 영상으로 보냈다. 그리고 전화를 해서 비공개로 영상을 분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희주의 사무적인 태도에 주웅은 마음이 상한 것 같았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현은 별 대꾸 없이 희주의 말을 들었다. 희주는 스피커폰으로 해 놓고 무원과 함께 정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거절해도 돼.”
희주가 정현에게 부탁한 일은 불법이었다. 현재 희주와 무원은 수사에 배제가 된 상태라 신원 조회 시스템에 접속할 수 없다. 정현이 대신 검색할 경우 기록에 남는다. 오치상이 그걸 문제 삼는다면 정현에게도 반드시 불이익이 갈 것이다.
“잘못되면 형사 때려치우고 입시학원 미술선생이나 하지 뭐. 혹시 알아? 정희주가 먹여 살려줄지.”
“난 너 책임 못 져. 그러니까 안 해줘도 돼.”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해. 이름이나 말해.”
“이인애. 사망일은 2002년 8월 24일.”
“남편 이름은 박창갑. 현재 이인애의 주민등록상 마지막 주소지에서 살고 있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박주희. 근데 주민번호가 말소됐어. 사망 같은데?”
“이혼 가정이었어. 남편이 폭력을 휘둘렀고.”
“그렇군. 아이는 여자가 사망한 다음 시설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네. 아이에 대해서는 좀 더 찾아볼게. 시설로 갔다면 분명 기록이 남았을 테니까.”
“내 생각도 같아. 주소 좀 문자로 보내 줘.”
“오케이. 사진도 같이 보낼게.”
박창갑은 집이 아니라 근처 사설 요양원에 있었다. 그는 휴게실 의자에 앉아 TV를 힐끔거리면서 자신을 찾아온 두 형사를 응시했다. 병색이 완연했다. 정현이 보내 준 사진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박창갑은 붉다 못해 검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딸을 찾은 거요?”
“네?”
“내 딸 주희 말이요.”
“따님은 사망한 게 아닌가요?”
“이렇다니까. 다들 같은 소리. 지난번 찾아온 형사한테도 딸 좀 찾아 달랬더니 죽었다는 말 딱 한 마디하고 가더니만.”
“누가 찾아왔죠?”
“그걸 어떻게 기억해. 10년도 더 된 일인데. 귀찮은 경찰 나부랭이들.”
“뭘 묻던가요?”
“돈.”
“돈이요?”
“마누라가 죽기 전에 가정부 일하던 부잣집에서 돈을 훔쳤대. 그년이 그렇다니까. 겉보기엔 맥없어 보여도 깜찍한 구석이 있다니까. 딸년이 그 물건을 빼다 박았어. 근데 난 몰라. 그게 무슨 돈인지, 얼마인지도 모른다고. 난 만 원 한 장 구경 못 했어. 그년이 어떤 놈팡이 밑에 갖다 바쳤을지 알 게 뭐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강희건이 분실물 신고를 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돈은 구린 구석이 있는 돈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받은 뇌물이거나, 누군가에게 줄 뇌물이거나.
이인애가 그 돈을 훔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니면 딸을 보호하기 위해? 강희건을 협박하기 위해서?
“따님이 아내분이 일하는 별장에 종종 따라갔다고 들었는데요.”
“밥이나 차리고 집구석이나 치울 것이지, 꼭 지 어미를 따라나섰지.”
박창갑은 억울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걔 좀 찾아 줘. 당장 간이식 안 하면 나 죽어.”
“왜 따님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시죠?”
“수녀가 그랬어. 찾지 말라고.”
희주는 조정배에게서 들은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조정배는 이인애라는 이름의 여자 뒷조사를 했다. 약점을 알아내려는 목적이었지만 그가 알아낸 것은 이인애가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수녀원에 가서 봉사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박창갑의 입에서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왔다.
“애 엄마가 봉사인지 뭔지를 다녔다고. 아마 수녀라는 여자가 마누라를 꾀어냈겠지. 돈도 안 주고 부려 먹으려고. 그 여자가 분명 뭔가 알고 있을 텐데. 마누라가 그 수녀 일하는 데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거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몰라. 마누라가 노상 끼적대던 공책에 써 놨을 수도 있지만.”
희주는 다 타 버린 나무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박창갑을 쏘아보았다. 그가 아내와 딸을 어떻게 대했을지 상상이 갔다.
“그 수녀라는 분이 따님을 찾지 말라고 하던가요?”
“그렇다니까. 난 엄연히 걔 애비야. 애비가 아프면 딸년이 당연히 도와야지. 안 그래?”
희주는 빨간 경차를 타고 별장 가사도우미 일을 다니는 여자를 떠올렸다. 여자는 폭력을 휘두르던 전남편이 혹시라도 성인이 된 아들을 찾거나 돈을 요구할까 봐 남편 성을 버리고 주민번호를 바꾸었다고 했다. 이 경우 친부라 해도 변경된 주민번호를 조회할 수 없다.
“아내분께서 생전에 별장 일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던가요?”
별 기대는 없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집 남자가 마누라를 건드렸다지만 난 안 믿었어. 다 가진 놈이 뭐가 아쉬워서 가정부를 건드려? 분명 그년이 먼저 그 허옇고 볼품없는 몸을 놀렸겠지.”
“그쪽에선 어떻게 나왔나요?”
“이런 추잡한 일 알려지는 거 바라겠어? 찾아가서 돈 내놓으라고 했어. 위로금 말이야. 남의 걸 날름 받아먹었는데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아내 말은 믿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볼 이득에는 눈이 밝은 남편과 산 이인애. 그리고 하나뿐인 딸. 희주는 어쩌면 그날 일을 목격한,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목격자일 수도 있는 아이를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찰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뭐 밤에 몰래 술을 먹고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나. 개죽음이지 뭐야.”
“아내분께서 평소 술을 즐기셨나요?”
박창갑은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을 휘휘 흔들었다.
“됐고, 딸이나 찾아 주쇼.”
희주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질문을 이어 갔다.
“아내분 물건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제 와서 뭘 확인해? 다 지난 일을 들춰서 뭐 하게?”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아내가 만취해서 남의 집 별장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는데 이상하지 않으세요?”
“뭐가?”
박창갑은 흐릿한 눈동자로 희주와 무원을 번갈아 보았다.
“말씀대로 따님을 찾아 보겠습니다. 대신 그 전에 아내분 소지품을 봐야 합니다.”
“맘대로 하쇼. 따로 모아 뒀으니. 그 대신 딸년 찾으면 바로 연락 좀 해 주쇼.”
희주는 박창갑의 면상을 한 대 갈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꾹 참고 돌아섰다.
수녀와 사라진 돈의 존재. 그리고 이인애의 딸 박주희.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정보가 쏟아졌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오치상과 강희건의 손이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희주와 무원은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희주의 상태는 당연히 최악이었다. 순간순간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심호흡을 계속해야만 했다. 괴한에게 졸린 목은 붉게 부어올랐다. 쏟아지는 정보의 타임라인을 줄 세우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머리에는 지끈거리는 두통이 계속되고 정신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듯 흐릿했다. 희주는 격하게 고개를 흔들다가, 목의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병원에 안 가도 돼요?”
무원은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지겨워. 그만 좀 물어봐.”
“병원이 그렇게 싫으면 애인이라도 집으로 불러요. 난 빠질 테니.”
희주는 대꾸도 하지 않고 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박을 재 보았다. 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달리는 것도 아닌데 마치 전력 질주를 하는 것처럼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좋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난 오늘 죽을 뻔했어.”
울고 싶지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눈이 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실핏줄이 터졌기 때문일 테지만 분노가 두 눈을 가득 채우다 못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가슴 어딘가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도대체 무슨 진실이 숨겨진 거지? 이젠 알아낼 엄두도 안 나. 왜 이 악몽이 끝나지 않는 걸까?”
“역시 관두는 게 좋겠어요. 선배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당분간 여길 떠나 있어요.”
무원은 천천히 손을 들어 희주의 등에 댔다. 손바닥을 타고 등으로 전해 오는 열기가 예상보다 더 뜨거웠다.
“선배를 위해서 그만두자고요.”
“전부 죽었어. 조정배는 나 때문에 죽을 걸까? 날 만나서? 날 만나고 돌아가서 죽었다고 생각하면 돌아버릴 것 같아.”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우연일 뿐이에요.”
“그놈이 조금만 더 날 오래 붙잡고 있었으면 나도 조정배처럼 죽었을 거야. 죽이고 싶었다면 죽일 수 있었을 거야.”
“아뇨. 내가 발견했을 거예요.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분노와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터져 나왔다. 그리고 증오심도, 지금 이 순간 무너져버리고 싶은 마음도. 희주는 억지로 눈을 뜨려고 애썼다. 눈물이 가득 차올라서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무원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원의 체온은 느낄 수 있었다.
“난 오늘 죽을 뻔했어. 그런데 안 죽었어. 그게 너무…… 기쁘고 슬퍼.”
무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더 말하고 싶었다. 주저앉아 버린 눈앞의 여자를 일으킬 만한. 하지만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원은 희주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