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그날, 이미 난 죽었어요.”
최준석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 페이션트 모니터 줄을 잡아당겨 간호사를 불렀던 그날 밤, 죽음을 예감했다.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된 전직 경찰서장. 이런 뉴스 기사 타이틀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바싹 말라 버린 입을 달싹였다.
“얼음 좀 드릴까요?”
주웅은 얼음이 담긴 종이컵을 최준석의 입가 가까이 댔다.
“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은 뇌수술을 받으실 겁니다. 다음 주 정도가 될 것 같군요.”
“뇌출혈입니까?”
“아닙니다. 뇌들보 재건 수술입니다. 현재 왼손이 환자분의 의지대로 컨트롤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환자분의 목을 조른 건 살인범이 아니라 환자분 본인입니다.”
최준석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가 미친 겁니까?”
“아닙니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다리가 부러진 겁니다. 재건 수술은 그걸 다시 붙이는 수술이 될 거구요.”
“내가 내 손으로…… 내 목을 졸랐다는 겁니까?”
최준석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듯 중얼거렸다. 자조 섞인 미소가 삐져나왔다.
“결국, 이렇게 돌아오는 건가.”
“왜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겼죠?”
희주가 물었다.
“죽은 이덕식과 주용훈에게 박세하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수술을 받았죠?”
“또 자네군.”
“왜 숨겼나요?”
“내가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는 걸 누가 알길 원하지 않았어. 아내에게조차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말할 수 없었네. 인정할 수 없었어.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어. 여자들이 죽었지만, 내겐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정말로 그랬으니까. 난 승승장구했고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잘 컸어.”
“정말 뻔뻔하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수술을 마치는 대로 경찰 조사를 받으실 겁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겠네.”
“피할 수도 없을 겁니다. 제가 똑똑히 지켜볼 거니까요.”
최준석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서장님이 여자들을 외면하고 오치상과 조정배를 내버려 둔 바람에 희생자가 계속 발생한 겁니다.”
희주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결국 그 잘난 돈 때문인가요?”
“이제 그만해. 아직 환자야.”
결국 주웅이 희주를 말렸다.
"정식 조사 때 모든 걸 말하겠네.”
최준석은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희주는 더 퍼부으려다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었다.
“팀장이 사라졌어요. 일주일째 가족들한테도 연락이 없어요. 잠적이라고 보기엔 가족들한테조차 언질이 없었다는 게 찜찜해요. 혹시 짐작 가는 거 있으세요?”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네?”
“오치상은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지 않았어.”
“그럼 스스로 총으로 관자놀이를 겨누거나 목을 조르진 못하겠군요.”
“아직 끝나지 않은 거야.”
최준석은 울고 있었다. 천천히 흐느끼던 그는 어느새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더 기대할 것이 없었다. 권위 넘치던 보안관이던 그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로 무너졌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아내와 딸이 보고 싶었다. 비록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가족이지만 그래도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문득, 죽은 여자들이 죽기 직전 무슨 생각을 했을지 벼락처럼 깨달았다.
“날…… 혼자 있게 해 주게. 제발 부탁하네.”
세하는 입을 벌린 채 휴게실 TV를 보고 있는 박창갑을 응시했다. 한때 자신의 아버지였던 남자는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아주 초라해져 있었다. 병 때문인지 나이보다 족히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저 남자의 유전자의 절반이 몸을 구성하고 있다는 자각을 할 때면 영원히 풀길 없는 저주에 걸린 기분이다. 박창갑은 세하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주희, 너냐?”
박창갑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세하는 천천히 걸어갔다.
“내 눈이 정확하다니까. 너라는 걸 딱 알아봤지.”
박창갑은 이제 더 이상 열 살 소녀가 아닌 성인이 된 딸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기쁜 기색을 숨기진 못했다.
“그때 찾아온 그 여자가 알려 준 모양이지? 경찰 놈들이 제대로 하는 것도 있군. 네 엄마가 우릴 갈라놨지만 우린 그래도 한 가족이야, 안 그러냐?”
박창갑은 요리조리 세하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검은색 원피스는 고급스러운 윤기가 흘렀다. 어깨에 걸친 가방은 아주 비싸 보였다.
“이젠 너만 믿으면 되겠다. 이 세상에 혈육이라고는 너와 나 둘뿐 아니냐. 우리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지.”
세하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박창갑을 만나러 오기 전 이미 간이식에 적합하다는 의사 소견서를 받았다. 박창갑는 눈을 찌푸리고 열심히 서류를 읽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는 활짝 웃었다.
“됐다. 이제 살았어. 이제!”
세하는 의사 소견서를 빼앗아 찢어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뭐 하는 짓이야?”
박창갑은 화들짝 놀라 쓰레기통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찢어진 서류 조각을 꺼냈다.
“살고 싶어요?”
세하는 입을 열었다.
박창갑은 세하를 쳐다보지도 않고 종잇조각을 맞추려 애썼다.
“엄마도 살고 싶었을 거예요.”
“왜 다 지난 일을 들먹여? 그런다고 죽은 니 엄마가 살아 돌아와? 이거 새로 가져와서 의사한테 갖다줘. 알아들어? 하여튼 지 엄마 닮아서 한번 말하면 듣질 않아. 애비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세하는 순간 어릴 적 그 집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손에 닿는 대로 뭔가를 집어 던질 때면, 엄마는 세하의 방에서 세하를 안아주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울지 않았다. 마치 절대 울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라도 한 것처럼. 울면 모든 게 끝난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게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무리 때리고 윽박을 질러도 울지 않는 엄마에게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느꼈다. 그럴 때면 더욱 고약한 말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끝엔 항상 별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조롱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울지 않았다.
“이젠 내가 당신을 버릴 차례야.”
박창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당신이 엄마와 날 버린 것처럼, 나도 당신을 버리겠어. 당신은 죽을 거야. 혼자, 쓸쓸하게.”
세하는 외눈박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세하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오로지 이 아이에게서만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끝났군.”
김재화가 말했다. 빅의 집기를 처분하는 일은 그가 맡았다. 아마도 영원히 컨테이너 창고 속에 보관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세하가 입은 복숭앗빛 스커트가 바람에 날렸다. 세하를 보면 이은애가 떠올랐다. 특히 저 무심한 눈빛이.
세하는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김재화에게 내밀었다.
“비행기표에요. 출발은 이틀 뒤구요.”
김재화의 동공이 흔들렸다.
“믿고 지낼 수 있는 분의 주소도 같이 넣었어요. 수녀님도 회복하는 대로 가시게 될 거고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결말은 저 혼자 내는 걸로 충분해요. 아저씨는 필요 없어요. 곧 수사가 시작될 거예요. 이제 남은 건 강희건뿐이니 전부 그쪽을 주시하겠죠.”
예상대로 세하는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가장 나중에 먹는 숙녀처럼 강희건을 아껴두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경찰들이 찾아올 거예요. 별장에 찾아왔던 그 여자 형사 기억해요?”
“주희야, 이제 그만둬라.”
김재화는 세하의 본명을 입에 올렸다. 그게 세하의 신경을 긁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김재화에게 세하는 여전히 작은 파랑새였다.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 전 이 구절을 닳도록 외우면서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버텼어요.”
“알고 있어. 그래서 널 말리고 싶은 게야.”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이 지옥에서 떠나야 하는 건 너야. 난 그럴 자격이 없다.”
김재화는 강희건이 별장 지하실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폭력을 못 이긴 여자들이 죽으면 그걸 처리하는 게 김재화의 일이었다. 그걸 차마 ‘일’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아저씨가 절 루시아 수녀님에게 데려다준 덕분에 전 살았어요.”
루시아 수녀는 세하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바꾼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세하는 돌아와 가장 먼저 김재화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그를 합류시켰다.
“이 손으로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난 떠날 수 없어.”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 없었다. 고통 없이 편안하게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싶었다.
“하지만 절 죽이지 않았잖아요.”
“네 엄마가 우릴 보고 있었어. 그리고 말했어. 널 보호해 달라고. 널 데리고 도망가 달라고.”
“엄만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러기엔 너무 많이 맞았으니까요.”
“아냐. 난 들었어. 불쌍한 그 여자의 목소리를…….”
김재화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20년 만에 세하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는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려 했다. 하지만 세하는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로 죗값을 치르길 원한다면 자길 도와달라고 했다.
“이제 거의 다 끝났어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떠나요. 그리고 조금은 새로운 삶을 살아 보는 거예요.”
세하는 조금 미소를 지었다.
“난 두렵다. 너마저 잘못될까 봐.”
김재화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미 많이 잘못되었어요.”
“난 널 말리고 싶었어. 그래서 네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어. 언젠가는 널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어.”
“알잖아요, 아직 남은 사람이 있다는 걸.”
“전부 죽일 순 없어.”
“아뇨. 전 끝을 낼 거예요. 죽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들은 비로소 돌아보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요.”
“강희건과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야.”
“소용없어요. 그런 쓸데없는 고민은 열 살에 이미 끝냈어요. 오래전에 배운 바에 따르면 강희건 같은 작자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남의 인생, 감정에 관심 따위 없어요. 그런 사람한테 뭔가를 제대로 보여 주지 않으면 계속 누군가를 고통에 빠뜨릴 거예요. 그걸 계속 그 별장에서 보고 싶어요?”
이덕식과 주용훈을 호텔과 자작나무 숲으로 불러낸 건 김재화였다. 강희건이 만나길 원한다는 말을 전했을 뿐인데 그들은 흔쾌히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두 사람에게 수면제를 탄 음료수를 먹인 다음, 손에 망치와 칼을 쥐어 주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최준석에게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다. 그는 앞의 두 인간들보다 신중한 타입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기습을 노렸다. 최준석은 자기 목을 졸랐다. 그것이 세하가 바라는 복수였다. 자신보다 약한 타인의 목숨은 파리 취급하는 인간들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스스로의 육체를 제 손으로 망가뜨리고 목숨을 끊는 것으로 속죄하길 바랐다.
“복수가 널 망가뜨릴 거다.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20년 전 그날, 이미 난 죽었어요.”
별장의 철제문은 열려 있었다. 철제문에 달린 감시 카메라 전원이 꺼져 있었다. 비상벨이 울리면 10분 내로 가장 가까운 파출소에서 경찰이 출동하는 보안 장치 또한 꺼져 있었다. 김재화가 미리 손을 써 둔 덕이었다.
세하는 철제문을 밀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잠들어 있는 저수지가 저 멀리 보였다. 마치 붉은 해가 저수지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1시간 정도 후면 어둠이 내릴 것이다.
지금 저 안에 그가 있다. 세하는 천천히 걸었다. 이곳 내부는 누구보다 잘 안다. 매일 이 길을 걸어 엄마와 함께 별장으로 갔으니까.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다리에 스치자 소름이 돋았다. 잡초 위로 끌려가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도 엄마는 아름다웠다. 그 기억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절대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놀랍도록 선명해졌다. 인간의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세하는 가방에 든 물건들을 떠올렸다. 빅에서 사용하던 대부분의 집기들은 전부 창고로 보냈지만, 수술 도구는 그대로 두었다. 김재화는 의아해하다가 세하가 뭘 하려는지 깨닫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김재화는 관리인들이 드나드는 통로를 알려 주었다. 직원용 비밀번호를 누르면 별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직원용 출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하실이 있었다. 지하실은 여러 개였다. 아주 평범한 용도의 지하실부터 아주 특별한 용도의 지하실까지. 강희건은 그때그때 구미에 맞게 장소를 택했다. 그 안에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 세하는 별장 청소를 하던 엄마가 강희건의 지시로 지하실에 내려가면 한동안 올라오지 못하던 일을 떠올렸다.
세하는 직원용 출입구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제 괴물과 조우할 시간이다. 하지만 세하는 얼어붙었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세하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