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는 그들의 이콘
실은 키지섬에 가고 싶었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유네스코 문화유산 사진집을 펼쳤을 때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사진을 만났다. 물 위에 떠 있는 섬. 바다에 연이어 솟아 있는 작은 성당이었다. 가을이었을까. 초록이나 빨강이나 노랑 같은 원색은 보이지 않고 온통 가을빛으로 저물어가는 섬에 나무로 지은 성당 풍경에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무로만 틀어올린 쿠폴. 나무로만 세운 벽과 지붕.
키지섬에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배 시간을 맞추며 다녀오기에는 무리였다. 그 먼 옛날로 향하던 마음이 벨리키노브고로드를 발견했다. 러시아 최초의 수도였던 노브고로드는 이 나라에 최초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씨를 뿌리던 곳이기도 했다.
키치섬은 못 가더라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나무성당을 꼭 보고 싶었다. 노브고로드의 목조건축박물관에 나무 성당이 있다기에 애써 들어갔다. 여기저기 공사중이어서 아쉬웠지만 키지섬처럼 나무 쿠폴을 가진 성당도 있었다. 그들의 통나무집에는 '아름다운 창'이라고 부르는 어여쁜 창들이 열려 있었다.
복원해놓은 전통가옥에 들어갔다가 그들의 ‘아름다운 장소’(красный угол, 성소)에 모셔진 이콘을 보았다. 생각지 못한 선물이었다. 정교인이든 아니든 러시아 사람들의 집에는 모두 있다는 그 특별한 공간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러시아인의 집에 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목조 성당을 보고 싶어 들어갔는데 비록 인위적으로 전시하는 곳이긴 해도 무척 반가웠다.
문득 그 아래 식탁에 앉아 꽁꽁 언 몸을 한 모금 보드카로 녹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나 있다는 바로 그 풍경. 그들은 이 성스러운 장소의 이콘 앞에서 성호를 긋고 사랑하고 싸우고 투덜대고 이별하고 아이를 키우고 죽음을 맞으며 살아왔다.
러시아 민중들에게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자작나무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땅. 축복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고 재앙이 되거나 두려움이거나 극복해야 할 장애이기도 했을 거대한 땅에서 태어난 그들에게 믿음은 끝없는 땅, 그들에게 주어진 지상의 조건을 헤쳐나갈 지팡이, 기대야 하고 의탁해야 할 손길이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던 원초의 신앙, 그 깊고도 오랜 신앙에 그리스도교라는 구체적인 종교가 스며들었다. 988년 낯설고 어려운 종교, 비잔티움의 종교가 러시아 민중들 안에 그들의 방식으로 체화되었다. 조상들로부터 이어진 종교가 새로운 이름을 얻고 새로운 옷을 입으며 그들의 삶에 더욱 긴밀해졌다.
어차피 끊어버리고 지워버리고 온전히 무에서 시작되는 일이란 없다. 그들이 기댔던 신들은 바오로 사도가 표현한 것처럼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들’이기도 했다. 단지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자신들의 개념을 투영해 붙인 이름을 얻은 것이었다. 이제 그 신들이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질서를 얻어갔다.
무수한 성인들이 옛 신들을 대신하여 공경을 받고 함께 간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페룬은 엘리야로, 그들의 벨레스는 블라시오 성인으로 대체되었다. 그들 안에 있었던 영적인 세계는 비잔티움의 종교와 만나 좀 더 활력을 얻고 비옥해졌다.
문맹이 많았을 테니 이 종교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어려웠다. 글자 대신 그림이 하느님을 알려주었다. 예수님의 수난이 그들의 삶이 기댈 십자가가 되고 성모 마리아가 그들에게 어머니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리스 혹은 비잔티움만 연상하게 되는 이콘이 실은 러시아에서도 천 년을 생생하게 살아왔다.
천 년. 혁명과 사회주의로 폐쇄되고 두려운 체제였던 철의 장막 러시아.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그들 안에 '그리스도'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은 놀랍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던 이들의 땅 아니었던가.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의 표현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마르크스). 그런데 그들의 삶에, 내가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이가 똑같이 신앙의 대상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도리어 낯설지 않은가.
‘아름다운 구석’에 모셔진 ‘판자 위의 회화’는 성소(聖所) 자체였다. 이콘을 그린 이는 화가지만 그 집을 터 잡는 이는 목수였다. 오랫동안 목수는 나무를 고르고 다듬고 이콘이 휘지 않도록 홈을 파고 꺾쇠를 박았다. 그 터에 비로소 화가들이 집을 짓는 것이다. 누구 한 사람의 공이라고 할 수 없는 공동의 수고였다.
지금 나는 한없이 소박하고 한없이 경건하게 나무를 다듬고 거룩한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는 이들의 시선을 느끼려 한다. 그들의 손길을 느끼려 한다. 지금은 도리어 낯설어진 그 마음, 그 눈빛, 그 손길을 그리워한다. 신을 그리워하며 신을 전하려 스스로를 도구로 여긴 이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이름을 내걸거나 돈을 벌 목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콘은 작자 미상이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최초의 성상화가는 복음사가 루카였다고 한다. 루카가 그렸다는 성화도 전해지고 있다. 루카가 최초의 성상화가로 전해지는 것은 거룩한 그림을 그리는 데에 그만큼의 조건이 전제되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는 마땅히 믿음이 있어야 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잘 알아야 했고 화가로서의 능력이 있어야 했다. 러시아 이콘 화가들은 거의가 수도자였다. 루블료프 역시 그랬다.
러시아는 비빌 언덕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들뿐이었으므로 이콘에 대해서도 한결 깊고 완전한 신뢰로 대했을 수 있다. 그만큼 고통이 커서, 세상의 어떤 논리들도 고통의 이유를 밝혀주지 못하고, 어떤 설명으로도 납득할 수 없어서 더더욱 이콘을 향해 이콘 속 세상의 존재에 대해 의탁이 커졌던 것일까.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러시아. 도대체 그럴 수가 없는 비합리성의 러시아. 어쩌면 그들의 비합리성은 그들의 고통과 비례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나 큰 상심 속에서는 명징한 이성적 판단이 어렵다. 무엇엔가 기대야 하고 무엇으로든 납득이 되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말짱한 사람이 보기에는 좀 주술적이거나 미신적인 믿음에도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의 이콘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슬픔의 정수 같다. 비록 그 재료는 세상만사의 아픔일지 모르나 용광로를 거쳐 나온 이콘은 말 그대로 정련 과정을 거치며 차가운 이성을 장착했다. 그리하여 이콘 자체에 주술이 개입하거나 맹신이 표상되지는 않는다. 이콘은 이미 보편적이 되었다. 그것이 신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