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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일기 Sep 15. 2024

X에게 여자가 생겼다


생각이 깊어졌다. 한 달 뒤 이혼하게 되면 나는 내 돈을 받을 수 있을까? X가 복수심에 내 돈을 주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X의 회사 앞에 찾아가서 피켓을 들고 돈을 달라고 시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니와 상의를 했다. 언니는 한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한 달 뒤 이혼 서류 접수를 하기 전에 법원 옆에 있는 공증사무소에 들러 X와 함께 돈에 관한 법적인 서류를 만들라고 했다. 1년 뒤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받게 되면 은행빚을 갚고 남은 돈을 반반 나누겠다는 각서 말이다. 생각은 좋은데 X가 과연 해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X에게 카톡으로 간단하게 설명했다. 의외로 X는 크게 거부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X가 이때쯤이면 방방 뛰고 화를 내야 하는데 너무 온순했다. 이 불안감은 뭘까. 한 달 뒤에 이혼 서류와 공증 서류를 모두 한 번에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너무 순탄하게 흘러가니까 더 무서워졌다. X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며칠 후 나는 X가 순순히 내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를 알게 됐다. 백화점에 갔다가 우연히 1층 로비에서 X가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X의 얼굴은 한없이 다정해 보였고 여자는 둥그런 얼굴에 착한 눈매와 선량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예쁘고 섹시한 느낌보다는 엄마와 같은 푸근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 그래서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릴 수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깨달았다. X는 새로운 타깃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X를 보았으나 X는 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다. 손발이 덜덜 떨렸고 본능적으로 기둥 뒤에 숨어 X를 관찰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려 내 귀까지 들렸다. 숨이 안 쉬어졌다.


무서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X에게 여자가 생겨 질투가 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새로운 여자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그 여자가 있어 나는 조금이나마 X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그녀 덕분에 더 이상 X로부터 복수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씁쓸했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이 오묘한 감정 때문에 하루종일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X는 본래 여자가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연애 시절에도, 결혼했을 때에도 X는 항상 자신의 스케줄에 나를 데려가는 것을 좋아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X는 관심받고 싶었다. 그런데 소심한 성격 탓에 늘 혼자 쭈뼛거렸다. X는 나를 데려가는 것으로 자신의 소심함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데려가면 혼자 서성거리지 않아도 되고 내가 있음으로써 자신감을 가지고 남들에게 말을 좀 더 쉽게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대부분 X를 위해 함께했지만 때로는 나의 일정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X는 그때를 참지 못했다.


하루는 그랬다. X는 오후 느지막이 아는 사람의 술파티가 있다고 함께 가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날 오전부터 오후까지 약속이 있어 안 되겠다고 거절했다. X는 화를 냈다. 내가 없으면 즐길 수가 없다고, 너 때문에 파티에 가서 기분을 망쳐야겠냐고 몰아붙였다. 내가 X에게 지인의 파티니까 가서 지인과 놀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안된다고 내가 꼭 가야 한다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하도 방방 뛰니까 알겠다고 하고 오후에 그곳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사람일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계획대로만 될까. 내 일정을 마치고 나니 몸살끼가 몰려왔다. 술파티까지 갈 생각을 하니 너무 아찔했다. 결국 X에게 몸이 아파서 못 가겠다고 미안하다고 사과의 메시지를 남겼다. X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 후 X는 파티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씩씩 거리며 핸드폰을 내 눈앞에서 내동댕이쳐 박살을 냈다. 나 때문에 즐겁게 놀지 못해서 파티를 망쳤다고 했다. X는 아파서 누워있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가 보다. 나는 X에게 약속을 해놓고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X는 분노로 입을 닫고 이틀간 말을 하지 않았다.


또 어떤 날은 X가 회사에서 연극 티켓이 생겼다며 함께 보러 가자고 했다. 퇴근 후에 극장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었는데 하필 그날 아침 X는 내게 어떠한 일로 인해 또 크게 화를 낸 후 출근한 상태였다. 나는 너무 속이 상해 가기 싫었다. 그런데 안 가면 X가 또 나를 며칠 동안 괴롭힐 것 같아 억지로 몸을 질질 끌고 갔다. 극장에 도착하고 보니 X는 친한 동료와 같이 와 수다를 떨고 있었고 떨떠름한 내 얼굴을 보더니 짜증을 확 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올 거였으면 차라리 오지 말지 그랬냐고. X는 나를 외면했다. 나는 눈물이 났다. 안 와도 뭐라고 하고, 와도 뭐라고 하고,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연극 시작 전 불이 꺼졌을 때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숨 쉬기가 어려웠다. 입을 크게 벌리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현기증이 났다. 졸도할 것만 같았다. 가슴을 부여잡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제발 눈에 띄지 말자. 제발 눈에 띄지 말자. 여기서 쓰러졌다가는 X가 또 화를 낼 것이다. 제발. 나는 최대한 눈을 감고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상 증세는 잦아들었고 나는 조용히 연극을 관람하고 집에 갈 수 있었다. 다시 그 이상 증세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이제야 그 증상이 '공황장애'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X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X는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X가 나오라고 할 때는 아파도 이를 악물고 나갔다. X의 비난이, X의 폭언이, X의 손가락질이 나를 두렵게 했다. 이제야 나는 평생 X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는다. 궁금하다. X는 새로운 여자친구와도 이런 관계를 맺게 될까?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 Rémi Wa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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