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담일기 Sep 16. 2024

부부관계 연극 심리치료


결혼 1년 차 때에 일이다. X의 지인이 당시 유한킴벌리에서 일했었는데 하루 동안 신혼부부학교를 연다고 X에게 와이프와 함께 놀러 오라고 했다. 우리는 그 초대에 응하여 신혼부부학교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열리는 갖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부부관계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대략 50쌍 정도의 신혼부부들이 모였었던 것 같다.


푸른색 커플티를 입고 매시간마다 오는 강사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며 신나게 웃고 떠들며 즐겁게 수업에 임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건 연극 심리 치료였는데 총 3쌍의 커플 지원자들을 받아 현재 겪고 있는 문제를 고백하게 한 뒤 무대 위 의자에 앉아 자신의 속마음을 내뱉는 수업이었다.


나는 당시에 X의 어떠한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이 수업을 통해 X가 얼마나 아이같이 행동하고 있는지 담당하는 강사로부터 질책을 듣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번쩍 들었고 X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강사에게 사연을 이야기했다.


집에 선풍기가 고장이 나 사려던 찰나, 지인이 자신이 쓰지 않는 새 선풍기를 주겠다고 했었다. 3일~4일 후에 그 선풍기를 받기로 했는데 X는 그 새를 못 참고 당장 당일배송으로 오는 새 선풍기를 사야겠다고 우겨댔다. 나는 강사에게 X가 늘 그런 식이라고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데굴데굴 구르고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 화가 나면 물건도 던진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강사는 X 대신 나를 무대 의자에 앉혔다. X를 부를 줄 알았는데 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나는 좀 의아했다. 강사는 말했다.


"지금 남편이 화가 나면 물건을 던지잖아요. 시간이 흐르면 점점 던지는 물건의 크기가 커질 거에요. 나중에는 당신을 던질 겁니다. 스스로가 계속 인식하고 고치지 않으면 그 버릇은 없어지지 않을 거에요.

어렸을 때부터 남편이 무언가 요구를 하면 그의 엄마는 무조건 사줬을 거예요. 엄마는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을 테고요. 지금 당신은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한 번이라도 남편의 요구를 거절한 적이 있었나요? 처음에는 안 사준다 안 사준다 했지만 결국 사줬을 거예요. 남편은 아는 거예요. 떼를 쓰면 언젠가는 당신이 사준다는 걸. 당신은 왜 제대로 남편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나요?"


나는 놀랐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강사는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나는 X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었었다.


"X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거절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네요. 제가 제대로 거절한 적이 없었네요."


강사는 다시 내게 물었다.


"자, 그럼 당신의 어린 시절을 좀 봅시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어땠나요?"


"어렸을 때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셔서 할머니 집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부모님과의 유대관계가 그렇게 깊지 않았어요. 그래도 저는 괜찮았고 외롭다거나 그립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어렸을 때 분명히 그 부분에 있어 상처가 있었을 거고 부모님에게 할 말이 많았을 거예요. 자, 눈을 감으시고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가 봅시다. 다시 눈을 뜨면 뒤돌아 서 있는 부모님이 보일 거예요. 그 부모님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한 번 해보세요."


눈을 감고 강사가 하라는 대로 했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저 할 말이 없어요."


"아니요, 제대로 속마음을 드러내 보세요. 괜찮아요. 가지 말라고 한 번 해보세요"


"아니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요."


강사는 더 이상 나에게 뭐라 말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을 뿐이다. 결국 급히 심리극을 마무리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강사는 내가 X의 비위를 맞춰줬던 이유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사랑을 X로부터 받으려고 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움받기 싫고 사랑받고 싶어서 X가 요구하는 건 전부 다 들어줬으니까. 사실 나는 내 부모님과 사이가 그렇게 가깝지 않았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내 부모님에게 아예 기대 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자리가 마련되어도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미 어린 시절에 나는 부모님에게 몇 번의 좌절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 역시 이런 관계가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 심리극에 참가했던 나머지 두 쌍의 부부 역시 부모와의 잘못된 관계로 인해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그 두 쌍의 부부가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 Alfonso Lorenzetto

이전 23화 X에게 여자가 생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