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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일기 Sep 17. 2024

나는 그 집을 기억한다


나는 X와 함께 살았던 그 집을 기억한다. 냄새를 기억하고 분위기를 기억한다. 그 집은 종종 꿈에서 나오기도 해 자다가 깨면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확인하고는 했다.


X와 내가 살던 집은 조그마한 거실 하나, 작은 방 하나, 큰 방 하나로 이루어진 작은 빌라였다. 거실을 좀 더 활용도 있게 써보자고 해서 냉장고를 작은 방에 두고 썼는데 집이 작았던 터라 크게 불편함 없이 잘 썼다. 작은 방에 냉장고를 넣고 한쪽 구석에 옷 행거를 설치하고 나니 이 작은 방의 쓰임새는 그걸로 끝이었다. 작은 방은 겨우 냉장고 문을 열만큼의 공간만 남겨둔 채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생활을 큰 방에서만 했다.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부터 X는 늘 화가 나 있었다. 지난 다이어리를 뒤적여보면 X는 일주일에 2~3번 정도 화를 냈고 정서적으로 불안했다고 쓰여있다. X는 무언가에 화가 나면 잠도 자지 않고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했는데 잠을 일찍 자는 나는 그게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다. 나에게 분노가 풀리지 않을 때에는 더더욱 스피커 소리를 한껏 더 키웠고 소리에 예민했던 나는 늘 잠을 설쳤어야 했다. 컴퓨터 바로 뒤에 침대가 있었던 탓이다. 대화를 하고 싶어도 X가 허락을 해야만 말을 걸 수 있었고 그전에 말을 걸면 그 분노의 기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불을 가지고 작은 방으로 건너가 혼자 잠을 자는 일이었다.


작은 방 안에 있는 그 거대한 냉장고 옆 자리에 이불을 깔고 누우면 간신히 나 혼자 누울 수 있는 자리가 나왔다. 작은 방에는 에어컨이 없는 탓에 늘 더웠고 겨울에는 난방이 돌지 않아 언제나 추웠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빨리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원인을 알 수 없는 X의 분노가 풀리기를 바랐고 이 작은 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예전처럼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천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찍 잠이 드는 스타일이라 잠을 설치는 일은 드물었다. 대신 잠이 엄청 늘었다. 어떨 때는 저녁 8시 전에 잠이 든 적도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X와 다툼이 있는 날은 기억이 별로 없다. 고통을 느끼기 전에 바로 잠들어버린 탓이다. 며칠 뒤 X의 화가 풀리면 X는 작은 방으로 건너와 내게 화가 풀렸음을 공지하고 어떠한 부분에 있어서 분노가 생겼었는지 말해주고는 했었다.


X의 화가 풀렸을 때쯤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중에 다른 집으로 이사 가게 되면 그때는 컴퓨터방과 침대방을 분리하자고 했다. 당신이 컴퓨터를 밤늦게까지 하게 되면 나는 잠을 설치게 되니 너무 힘들다고 했다. X는 반대했다. X의 의견은 이러했다. 컴퓨터 뒤에는 반드시 침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컴퓨터방과 침대방을 강제로 분리하면 자기는 컴퓨터방에 별도로 간이침대를 두고 거기서 잘 거라고 했다. 그리고 침대방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라며 그렇게 되면 영원히 넌 나랑 못 자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데 그때 당시에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건지 X의 의견에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 때는 그 작은 방이 X가 나에게 벌을 주는 방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슬펐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방은 내가 X의 분노로부터 도망친 방이었다. 나는 내가 고통에 둔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내가 이혼하자고 했을 때 X가 가장 먼저 제안했던 것은 새로운 집에 있는 작은 방에 자신이 들어가겠다고 한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X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내가 겪었던 그런 고통을 X에게까지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X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X에게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한 일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X와의 이혼이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 arnie c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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