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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희 Oct 27. 2024

#9. 여기는 생애 마지막 분실물 센터입니다.(9)

-수줍은 비밀일기장에 담겨있던 여자아이의 추억 한 자락.

문득 잘 깎은 사과조각처럼 곱게 휜 아이의 눈매를 잠시 쳐다보던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순간 내 눈앞에 어떤 여자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다만 그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를 썼지만, 선명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을 쓴 것처럼 여자의 얼굴은 흐릿하고 희미하기만 했다.


“머리 아프네.”


지끈거리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아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어왔다.


“아저…아니 총각 귀신님, 괜찮으세요?”


나는 대답대신 두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어차피 여기서 잘 떠오르지도 않는 여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 애써봤자 기억이 떠오를 리 만무했다. 


결국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허리를 펴고 곧은 자세로 앉았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할 순간이었다.


“준비됐어?”


내가 묻자 아이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아이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아이의 일기장에 담긴 추억은 무엇일까. 


나는 아이가 추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몇 마디 말을 건넸다. 한 번 해봤다고 두 번째는 훨씬 더 수월했다.


이윽고 아이가 눈을 감았다. 곧이어 아이의 내뱉는 숨소리가 차분해졌다. 나는 가지런히 무릎 위에 놓인 아이의 손 위에 내 손을 슬쩍 얹고는 눈을 감았다. 


곧이어 아까도 봤던 칙칙한 필터가 적용된 화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은 1인실 병실이었다. 여자아이가 환자복을 입은 채 슬픈 표정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아까 아이가 자신이 무척 외로웠다고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병실 구석에 서서 아이를 관찰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의사와 간호사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의사는 아이더러 몸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다. 아이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멍한 눈빛으로 창문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의사는 뇌 CT 사진을 들여다보며 종양의 크기가 여전하다는 말을 몇 마디 주워섬기고는 병실을 나갔다. 그러자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이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날 낫게 하지도 못할 거면서. 차라리 이럴 거면 학교나 보내주지.”


나는 그 말로 미루어 여자애가 오랫동안 이런 갑갑한 병실 생활을 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낫기 힘든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 또한.


나도 모르게 아이에 대한 동정심이 치밀었다. 그렇다 해도 애석하지만 내가 지금 상황에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모든 일에는 각자가 관여할 수 있는 권한과 범주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건 그저 관찰자의 역할밖에는 없었다. 그 외의 것에 개입하는 순간 여자가 말했듯 나의 무사한 환생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의 안타까운 상황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갑갑했다. 해서 빨리 아이의 회상 부분이 지나갔으면 싶었다.


잠시 누워있던 아이는 이윽고 누군가의 문자 메시지를 받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처음으로 목격한 아이의 햇살같은 미소였다.


아이는 그 뒤로도 간간히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장을 읽을 때면 아이의 귓불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아마도 문자 상대가 바로 아이가 만나고 싶어 하는 남자애일 거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몇 차례의 문자 주고받기가 끝난 아이는 곧바로 노트북을 켜고 수업을 들었다. 아픈 아이들을 위해서 병원 화상 연계 수업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그런 종류의 수업인 모양이다.


아이는 노트에 필기까지 착착 해가며 수업을 집중해서 들었다. 중요한 공식에는 형광펜으로 밑줄도 쫙 그었다. 아이가 지금 공부하는 폼만 보자면 수시로 서울대도 붙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수업을 다 듣고는 자신이 필기한 노트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그리고는 그걸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아마 아까 문자를 주고받았던 상대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던 아이는 급히 일을 마무리 지으려다 자칫하면 엎어질 뻔 했다.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고 무사히 전화를 받았다.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아이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근을 구하는 공식에 미지수 X를 대입하면 되는 거지?


-응. 그리고 노트필기가 아주 깔끔하게 되어 있어서 놀랐어. 한 번 보면 안 잊을 것 같아. 이거, 친구들한테 공유해도 돼?


상대 남자아이의 말에 아이가 세상이라도 얻은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얼마든지!


그 뒤로는 다른 장면으로 빠른 전환이 이어졌다. 어느 중학교 교실이었다. 아이는 교복을 입고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아이는 수업시간에 화장실에 가는 걸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이 주변의 학생들이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스쳐지나갔다. 마치 DSLR 카메라의 조리개를 장시간 열어두고 빛에 노출시켜 찍은 사진처럼 보였다.


오전 수업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아이에게 말을 걸어오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수학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아이에게 한 남학생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 문제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혹시 설명해줄 수 있어?”


아이는 무척 친절한 태도로 남학생에게 문제풀이를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남학생이 아이에게 초콜릿을 건넸다.


“고마워. 덕분에 머리 아프던 게 싹 가셨네.”


“이런 건 주지 않아도 괜찮아.”


“혹시 초콜릿은 별로 안 좋아해?”


“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레 남학생에게서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그럼 잘 먹을게.”


아이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초콜릿을 제 가방에 쏙 집어넣었다.


이어지는 체육시간에는 피구 시합이 있었다. 아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을 정면으로 맞고 있던 아이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위태로워보였다.


다른 아이들은 맹렬한 속도로 피구공을 주고받았다. 몇 차례의 공이 오가고 공에 맞은 아이들이 코트 밖으로 나갔다. 


한 번에 두 명이 아웃된 팀에 소속된 학생이 분하다는 듯 거칠게 공을 던졌다. 순간 미처 그걸 피하지 못한 아이가 공을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아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만 비명을 내지를 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대로 아이의 무릎이 바닥에 털썩 닿았다. 학생들은 죄다 서로 눈치만 볼 뿐 아이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그때 남학생이 급히 아이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남학생은 아이를 보건실로 데려갔다.


“고마워. 나 때문에 괜히 번거롭게 됐네. 체육 수업에 참여하고 싶을 텐데.”


“아냐, 괜찮아. 아까 공 맞은 곳은 괜찮아?”


남학생은 무척 다정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봐주었다. 아이는 수줍어하면서도 남학생과 몇 차례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내겐 두 아이의 풋풋한 감정의 교감이 순수하면서도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그 날, 하교하던 아이는 문구점에 들러 비밀일기장을 하나 샀다. 바로 소중한 유품으로 골랐던 그 일기장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방에서 몰래 일기장의 앞면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아마 그날 있었던 설레는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아이는 늘 학교에 갈 때면 가방에 비밀일기장을 챙겨갔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는 일기장에 간단히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어느 날, 그런 아이에게 남학생이 다가와 물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써?”


놀란 아이는 황급히 일기장을 덮었다. 그러자 당황한 남학생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괜찮다고 겨우 말을 내뱉었다.


그 뒤로도 남학생은 아이에게 종종 어려운 수학문제 풀이법을 물어왔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친절하고 자세하게 문제를 설명해주었다.


어느 날, 문제풀이를 다 들은 남학생이 아이에게 포장한 선물 꾸러미를 건넸다. 


“네가 필요할 것 같아서.”


아이는 몰래 화장실에서 선물의 포장지를 뜯었다. 그건 비싼 일제 샤프였다. 아이도 갖고 싶었지만 살까말까 고민하던 바로 그 샤프였다.


그 뒤로 아이는 줄곧 그 샤프만을 이용해 필기를 했다. 평소 같으면 볼펜으로 썼을 내용도 죄다 샤프로 적었다. 


그 무렵부터 아이는 남학생과 같이 하교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연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같이 하교하는 게 서로에게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있었다.


“근데 너 말야. 일기장에 뭘 그렇게 자세히 적는 거야?”


“내용이 궁금해?”


“응. 자물쇠까지 꽁꽁 잠가놓은 걸 보면 아마 무척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내용 같은데 말이지. 혹시 좋아하는 남자애에 관해서 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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