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깨달은 진심 앞에선 누구도 후회할 수밖에 없기에.
“말도 안 돼!”
속내를 들킨 아이는 발끈하며 황급히 그 말을 부인했다. 하지만 남학생은 눈치가 빨랐다.
“그렇게 반응하니까 더 수상한데?”
“무슨 헛소리!”
“우와,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새로운 모습인데?”
“정말 바보 같아! 오늘은 나 먼저 갈래.”
아이는 당황한 표정을 하고는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일기장에 그날 남학생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 일기장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가져가야 할 게 틀림없었다.
아이는 날마다 학교에 일기장을 가져가서 틈틈이 글을 적었다. 그런데 하루는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 바람에 급히 책가방을 챙기다가 그만 일기장을 깜빡하고 교실에 놓고 와버렸다. 결국 그날 밤, 아이는 상태가 나빠지는 바람에 결국 다시 입원을 하고 말았다.
아픈 와중에도 아이의 머릿속에는 그저 일기장을 혹시라도 다른 친구들이 보게 될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아이가 학교에 두고 온 일기장을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남학생이 아이의 병문안을 왔다. 순간 아이는 놀라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긴 어떻게 왔어?”
“네가 이걸 무척 찾고 있을 것 같아서. 맹세코 내용은 절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어.”
남학생은 그렇게 말하더니 아이에게 비밀일기장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여학생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 그렇게 예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뭐라고?”
“아냐. 네가 좋다니 됐어.”
그렇게 말하는 남학생의 뺨이 어느새 붉어져있었다. 아이는 여기까지 와준 남학생이 너무도 고마웠다. 해서 그럴싸한 대접을 하고 싶었다.
아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냉장고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던 남학생이 아이를 제지했다.
“아픈데 무리하지 마. 난 아까 급식을 많이 먹었더니 배가 아직도 부르거든.”
“그래도. 일기장을 친절하게 여기까지 갖다 줬으니까 사례는 해야지.”
“그럼 음식 말고 다른 건 어때?”
“그게 뭔데?”
순간 남학생이 아이를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거기에 깃든 순수한 열정이 느껴져서 나는 한시도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남학생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나랑 교환일기를 쓰는 거야.”
“교환일기?”
“응. 서로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하루 일상을 적어서 주는 거야. 그걸 받은 상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시 적어서 일기장을 돌려주는 걸 반복하는 거지.”
남학생의 눈빛에 담긴 진지한 바람을 읽었는지 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너에겐 보여줄게.”
“뭘 말이야?”
“네가 여태 궁금해 하던 거.”
아이는 남학생에게 비밀일기장과 함께 열쇠를 건넸다.
“이걸 왜?”
“어차피 교환일기를 쓰다보면 다 들통 날 것 같아서. 언젠간 너도 알아야 할 테니까.”
집에 돌아온 남학생은 급히 방으로 가서 문을 걸어잠갔다. 남학생은 떨리는 마음으로 일기장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그간 남학생이 아이에게 보여준 관심과 친절한 배려가 얼마나 눈물겹게 고마웠는지에 대한 아이의 진솔한 마음이 낱낱이 적혀있었다.
-20XX년 4월 7일
솔직히 말해서 이쯤 되면 그 녀석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수학문제를 몰라서 물어봤다고 하기엔 녀석은 매번 수학 단원평가에서 백점을 맞는다.
-20XX년 5월 19일
피구공을 맞은 곳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지만 그건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게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주고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건 그 녀석뿐이다. 그래도 내 주위에 그 녀석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20XX년 6월 2일
뜻하지 않은 비가 왔다. 그냥 맞고 가기엔 제법 비가 많이 내렸다. 내가 창문만 바라보며 난감해하고 있는데 그 녀석이 내게 제 우산을 불쑥 내밀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지만 이미 녀석은 사라진 뒤였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녀석은 비를 쫄딱 맞은 채 머리에 가방을 얹고 뛰어가고 있었다. 진짜 바보 같다. 녀석은 내가 뭐라고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걸까.
일기장을 묵묵히 읽어 내려가던 남학생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아이가 쓴 일기를 다 읽은 남학생은 일기의 맨 마지막 장에 이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XX년 7월 14일
내가 바로 앞의 일기장에 나왔던 바로 그 녀석이다. 난 오늘부터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교환일기를 쓰기로 했다. 그래서 너무 기쁘고 기분이 좋다. 그 아이는 수학을 잘 푼다. 그리고 공책 정리를 잘 한다. 가지런하고 둥글둥글 모나지 않은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그 아이의 귀여운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가 보고 싶을 때면 내 문제집에 적어준 수학 풀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곤 한다. 사실 지금도 그 아이가 보고 싶다. 그 아이가 학교에 나오는 날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 뒤로는 아이와 남학생은 계속해서 그들만의 소중한 일기를 주고받았다. 아이가 학교에 나갈 때면 다른 아이들 몰래 상대의 책상이나 사물함에 비밀일기장을 넣어두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면 남학생이 병실에 직접 와서 아이에게 일기장을 건네주고 받으러 들르곤 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의 안색이 점차 안 좋아졌다. 게다가 아이의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졌다. 급기야 아이는 머리에 비니를 쓰기 시작했다. 그간 아이는 어떻게든 비니를 쓰지 않고 버텨보려 했지만 머리카락이 빠져버린 부위가 너무 넓어져버렸다.
혼자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밀면서 아이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미용실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마치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맥없이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보였다.
언젠가 문학 수업시간에 배웠던 마지막 잎새의 내용을 아이는 떠올렸다. 아이는 과연 제 삶의 종착지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를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녀석과의 인연을 이어나가는 게 나은 걸까 아니면 이제는 제 삶을 살아가라며 놓아줘야 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결국 미용실에 다녀오고 며칠 뒤, 아이는 병문안을 온 남학생을 다시 돌려보내고 말았다. 남학생은 아이의 병실 문 앞에 자신이 쓴 글이 담긴 비밀일기장을 놓고 갔다. 아이는 남학생이 거기에 뭐라고 썼을지 내용이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아이는 비밀일기장을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제가 누운 매트리스 밑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다음 날 찾아온 남학생이 간호사를 통해 안부를 물었지만 아이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아이는 남학생이 보내온 문자와 전화에 시종일관 무응답으로 반응했다.
사실 그즈음부터 아이는 지독한 고열과 구토에 시달렸다. 그간 써오던 온갖 약물들로 인한 부작용이 한데 모여 폭풍처럼 아이의 몸을 온통 들쑤시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아이는 더 이상 토할 것도 없는데 노란 위액을 연신 쏟아냈다. 이미 아이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이의 몸이 들끓었고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제 마지막 순간이 곧 들이닥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아이는 후회했다. 이렇게 짧고 허무하게 끝날 인생이었다면 적어도 살아있는 순간만큼은 그 녀석과 마지막까지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녀석을 일부러 밀어냈던 건 그게 그 녀석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과연 그 녀석도 아이의 행동을 그렇게 받아들였을까.
언제나 후회는 너무 늦은 순간에 찾아온다. 아이는 그걸 뼈저리게 느끼면서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내려 매트리스를 들췄다. 그리고 비밀일기장을 꺼내 거기에 적힌 녀석의 글을 읽었다. 그걸 읽고 있던 아이의 눈에서 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이걸 이제야 본 걸까.
-20XX년 8월 27일
여름방학이 어느새 끝나가네. 사실 너랑 꼭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어. 여기서 버스로 두어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바닷가인데 경치가 진짜 좋아. 거기 가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자유롭게 나는 바다새들의 모습을 실컷 볼 수 있어. 언젠가 네가 병을 떨치고 자유로워지면 그땐 나랑 같이 이 바다에 왔으면 좋겠다.
-20XX년 9월 3일
언제부턴가 자꾸만 네가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아 속상해. 내겐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진 네 뒤통수마저 귀엽기만 한걸. 넌 왜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 요새 넌 나를 바라보지 않고 그저 슬픈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는 것 같아. 왜 너는 나와 다시 친해지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려는 걸까. 나는 그게 너무도 아쉽고 슬퍼.
남학생이 쓴 일기는 거기에서 끊겨 있었다. 아이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었다. 아이는 남학생에게서 온 문자를 읽었다.
-20XX년 9월 9일
간호사 누나가 건네준 네 사진을 한참을 들여다봤어. 확실히 전보다 더 몸이 마른 것 같아. 네가 괜찮다면 우리가 함께 맛있게 먹었던 떡볶이집에서 떡볶이를 사오려고 했는데. 넌 그게 무척 맵다며 물을 몇 컵을 마시면서도 밝은 표정으로 어느새 떡을 집어먹곤 했지. 난 떡볶이를 먹으며 평소보다 더욱 활달하게 반응하는 네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좋았어. 네게서 느껴지는 생기와 발랄함이, 네 웃음소리를 포함한 너의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
-20XX년 9월 18일
여전히 넌 내 연락을 받질 않더라. 그래도 이렇게나마 내 소식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좀 더 오랫동안 널 지켜보고 싶었는데 다음 주면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난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까 가족들에게 날 한국에 놔두고 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요청을 묵살당했어. 적어도 출국하기 전에 네 얼굴을 한 번 보고 가고 싶었는데, 인생이 내 뜻대로만 되진 않는 것 같네.
그간 곰곰이 돌이켜봤어. 네가 왜 나와 만나기를 거부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외면했을 지에 대해서도. 아마도 넌 지금 무척 외롭고 괴로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것으로 우리의 인연이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네가 보고 싶을 때면 내 문제집에 네가 적어준 수학 풀이를 가만히 들여다 볼 거야. 그리고 우리가 함께 했던 추억들을 곱씹을 거야.
우리가 앞으로 영영 서로를 볼 수 없다고 해도 서로에 대한 추억을 잊지 않는다면 우린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비록 네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해도 내가 네 손을 놓지 않고 꼭 붙들면 우린 이어져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린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난 널 다시 보게 될 그 순간을 차분히 기다려보려 해.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네게 꼭 말해주고 싶어. 넌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소중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소중한 사람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