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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홍 Sep 22. 2021

오!늘 사진 [15] 가시 밤송이 사랑보다...

고슴도치도 아닌 것이

뾰족뾰족 사방팔방 가시를 세웠다.


씨앗 밤송이를 보호해 어떡하든 자손을 퍼뜨리고자

어미 밤나무는 밤 낮 쉬지 않고

보드라운 물과 양분을 제 살을 깎아

독한 사랑으로 바늘처럼 갈고 갈았다.   


빈 틈 없는 억센 가시 투구로도 마음이 안 놓여...

야생동물의 단단한 이빨로 깨물어야 겨우 벌어지

딱딱한 껍질 갑옷으로 이중 보호하고,

떨떠름하고 텁텁한 속껍질로 한번 더 삼중으로 감쌌다.


"이래도 먹어볼 테면 한번 먹어보시라!"

어미 밤나무의 자식 사랑이 비장하게 가시 돋쳤다.


아빠가 만든 작은 방죽이 있던 논 둑에 밤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한가위가 가까운 이맘때 가보면

어린아이 걸음에 길고 긴 비탈진 논 둑은 정갈하게 풀이 베어져

풀향기가 솨! 하니 코 끝을 간지럽히고...

두 그루의 밤나무에는 가시 방울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아빠!"

가슴까지 자란 누레진 벼 포기 속에 엎드렸던 아빠가 허리를 펴고 웃으셨다.

"먼 길을 뭐하러 왔어..."

대대로 내려오는 유교 예의범절이 몸에 밴 아빠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린 딸을 위해 따가운 밤송이를 여러 개 따셨다.


논 흙이 묻은 두 발로 억센 밤송이 가시를 밟고 씨름하여

갈색으로 빛나는 예쁜 햇밤 서너 알을 두 손에 쥐어주셨다.


가장 큰 밤톨을 골라, 도구가 마땅찮았던 아빠는

어금니에 밤톨을 물고 딱! 균열을 낸 뒤

앞니로 단단한 갑옷 껍질을 벗겼다.

떨떠름하고 텁텁한 솜털을 앞니로 살살 긁어 입 안 가득 물었다가 뱉어내면서

하얀 속살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벗겨내셨다.


밤 톨 하나 먹기 위해...

오랜 시간 땀을 뻘뻘 흘리는 아빠를 지켜봐야 했다.


아~!

드디어 입 안에 들어온 햇생밤은 오도독 오도독 소리도 경쾌했다.

다 벗겨지지 못한 텁텁한 솜털 맛이 살짝 돌긴 했지만

달큼하고 아삭한 식감은 눈깔사탕보다 맛났다.


철딱서니 없는 어린 딸이 밤 한 톨... 

눈 깜짝할 사이에 깨물어 먹는 동안

아빠는 얼른 다른 갑옷 밤 장군과 씨름하고 계셨다.  


다음 카페 뿅카
햇밤이 왔어요. 햇밤!
맛난 햇밤 한 되에 8천 원! 1분이면 금세 깎아 드립니다...


해도 다 지고, 9시가 가까운데

아파트 앞 소형 트럭 확성기에서 성우 뺨치는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처음엔 그 앞을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무언가가 뒤통수를 잡아당기듯 직진하던 나의 발걸음을 우뚝! 세우고...

발길을 다시 돌리게 했다.


만 원을 주고,

보일러처럼 생긴 기계에 밤 한 되를 넣으니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밤 껍데기가 날렸다.

1분이 좀 더 지났을까...

앞 쪽에 위생비닐을 대고 뚜껑을 열자 금세 하얗게 깎인 밤들이 쏟아졌다.  


낭군과 함께 침대에 누워 생밤 봉투를 열었다.

오도독 오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달큼한 생밤이 씹혔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왜 나는... 매년 삶은 찐 밤이나 불에 군 밤보다

아삭아삭 씹히는 생밤을 먹어야만 이 가을을 날 수 있는지...

26년 전 아빠는 위암이 발견되고, 보름 만에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다.
오도독 오도독 생밤 깨무는 소리를 들으며 깨닫는다.
아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걸!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밤나무 아래 서자, 갑자기 투둑 하며 가시 밤송이가 떨어졌다. 마치 자기 존재를 알리듯이! : 사진 by연홍
밤 깎는 기계로 1분 만에 깎여 나온 생밤 : 사진 by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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