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미피케이션 시대에 '깐부'와 '깍두기'?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세상)은 지옥이야. [드라마 '미생' 인용]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인용]
문제 속에 파묻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흔히들 하는 말...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라."
겨우 한 발의 거리일 뿐이지만, 주관에서 객관으로 '관점의 변화'는
이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 밀턴은
"인간이 낙원을 잃어버렸다!"라고 대서사시로 읊었는데...
결단코 아니다! (NEVER Lost Paradise!)
우리에게 "죽겠다"는 말은 실제로 죽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 상태를 강조하거나 뜻을 부풀려 표현하는 일상 어법이다.
배 불러도 죽겠고, 배 고파도 죽겠다.
좋아도 죽고, 미워도 죽는다.
재밌어 죽을 지경이고,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
놀이를 할 때도 "죽었다" "살았다"는 말을
"졌다" "이겼다"는 말과 통용해서 흔하게 사용한다.
어찌 보면 현실을 게임에 반영한 것이리라.
입시경쟁, 취업경쟁, 성과경쟁, 주식투자경쟁, 사업경쟁 등등
크고 작은 경쟁에서 실패의 쓴 맛을 본 이들이
실제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IMF 이후 점점 증가하다가
2003년부터 OECD 국가들 중 부동의 1위다. 2017년 2위로 내려온 걸 제외하곤.
고령화에 따른 질병,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생활고, 우울증 등
이런저런 절박함에 몰려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에 36명이라니...
게댜가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정서적이고 경제적인 피해는
고스란히 자해나 자살 등 비극적인 시도로 이어져
응급실에 실려오는 사람이 하루 100여명이라고 한다. [아이뉴스 24]
다만 돈이 너무 없어도 사는 재미가 없었지만
막상 돈이 너무 많아도 사는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일남 씨의 입을 통해
죽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묻는다.
"아직도 사람을 믿는가?"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일남 씨가 무엇을 놓쳤기에
동물가면을 쓰고, 가짜 인생을 사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아니,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 되었는지...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겠다는 '깐부' 정신을 가지고
처음부터 힘과 지혜를 모아 협력했더라면... 충분히 함께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굳이 반칙을 하지 않아도
그 열쇠를 숙소의 벽 그림 속에 훤하게 누구나 다 볼 수 있게 그려놓았음에도
드라마의 후반부에야 보여줌으로써 아!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하지만 그 열쇠의 마지막 핵심은...
서로에 대한 끝까지 변치 않는 믿음(신뢰)이다.
또한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인 '깍두기'를
혐오하지 않고 따돌리는 폭력이 아니라,
양쪽 편에서 모두 공동으로 책임지고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다.
그리고... 456억을 최후 승자가 혼자 꿀꺽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1억이라 할지라도 자족할 수 있는 욕망의 절제다!
디지털 혁명을 통해 일상의 재미없는 활동을 게임화해서
재미와 참여를 유도하는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
세상을 움직이는 트렌드가 되었다.
게이미피케이션은 사용자들이 일상생활을 게임하듯이 몰입하게 유도한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거대한 가상 게임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세상에서
'MZ세대'로 불리는 적응이 빠른 젊은층일수록
'의미'보다는 ‘재미’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묻는다.
'재미'만 있으면 세상이 살벌한 생존게임판으로 변질되어도 상관없는가?
사실 기훈과 상우는 황동혁 감독의 분열된 두 자아였듯이
우리도 마지막 순간 결국 마주해야 할 최고의 적이자 동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닐는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그저 '이 땅에 툭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같은 생명의 근원에서 비롯된 한 형제 한 자매로서 이 아름다운 낙원에 소풍 왔음을...
천상병 시인처럼 깨어있는 영적 선배들은 누누히 말해오지 않았던가.
우리는 밀턴의 말처럼 낙원을 잃어버린, 실낙원(失樂園)을 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낙원을 보는 눈을 잃어버린, 실개안(失開眼)을 한 것이 아닌지...
아직도 인간을 믿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