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가장 빛나던 순간

- 2025년 9월 23일 화요일 -

by 최용수

♡ 프레데리크 쇼팽 (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

<피아노 협주곡 1번 마단조 Op.11/ Piano Concerto in E minor, Op.11>


https://www.youtube.com/watch?v=V1GQ_1d3VE8 (3악장 Rondo (Vivace))


제법 차가운 기운에 오늘 아침은 이불의 포근한 유혹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창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가을바람이 아니라 벌써 겨울냄새가 나는 바람이다. 서늘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다. 달력을 보니 오늘은 추분(秋分)! 이제 아침 일출도 동짓날까지 점점 늦어질 테고, 아침 기온도 조금씩 더 떨어지면 아침 산책시간도 늦춰지려나... 결국 산책 시간만 좀 짧아졌다.

브런치 대문을 장식할 사진을 고르다 영종도에서 바라본 인천대교 사진을 찾았다. 청명한 가을 오후에 찍은, 인천대교 앞바다가 온통 은빛으로 물든 사진이 마치 "지금이 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저렇게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정말 지금이 그때인 건가?


회사에 입사하고 첫 방송을 마쳤을 때, 동생 때문에 들른 병원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유달리 큰 울음소리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알리던 딸들의 감동적인 출생의 순간, 이제 30만 킬로미터를 향해가는 우리 집 첫 SUV '쏘랭이'를 인도받던 날, 서울에서 마침내 드디어! 소중한 우리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날...


내가 가장 행복했다고 느낀 순간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그 행복한 순간들 사이사이 힘들고 어렵던 시간들의 기억들도 되살아났다.


올해는 내가 56년을 살아오면서 그동안 부딪혀보지 않았던 가장 실존적(實存的)인 질문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가장 뾰족한 경계(境界)에서, "나는 누구인가?", "지금 여긴 어디인가?" 묻고 있다.


아버지와의 예정되었던 이별... 또 숙제처럼 남겨진 예정된 이별...

30년 넘게 내 삶의 좌표를 규정해 온 운명(運命) 같은 직장에서의 마지막 책무(責務)!


'빛과 어둠'처럼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로 뒤엉킨 이 모순된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때는 언제였을까? 혹시 아직도 그때가 오지 않은 것인가? 이 모순의 세계로부터 떠나게 되는 임종(臨終)의 순간에 비로소 내 인생은 가장 찬란한 빛을 얻게 되는 걸까?


늦은 산책을 마치고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오는데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갔음직한 어린 남매가 문을 열고 나오며 "안녕하세요"라고 해맑은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한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찬란한 원광(圓光)을 봤다.

책상에 앉아 그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목소리를 떠올리며 오늘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3악장을 골랐다. 산책을 나서기 전의 내 마음은 이 협주곡의 1악장처럼 무거웠고, 2악장의 애닮음을 지나니 또 이 모순된 세계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는 3악장이 있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작곡될 무렵 낭만주의의 파도가 일렁이던 유럽


이 곡은 1830년, 20세의 젊은 쇼팽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작곡했다. 이 곡이 쓰여질 당시 유럽 사회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모두 커다란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820~30년대에 이르러 낭만주의가 음악계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었으며, 베를리오즈와 같은 작곡가들이 오페라, 교향곡 등 대관현악적 색채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파리는 살롱문화가 활발히 발달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피아노가 중심이 되는 소규모 연주회가 귀족과 신흥 자본가 계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쇼팽은 이러한 환경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바르샤바에서 성장했지만, 유럽 음악의 중심지 파리와 빈에서 유행하던 음악은 바르샤바에도 이내 유행하게 되었고 쇼팽은 이런 음악적 자극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쓸 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칼크브레너(Friedrich Kalkbrenner, 1785~1849)와 오스트리아의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 같은 대가들이었으며, 특히 훔멜의 협주곡 양식을 바탕에 두고 쇼팽만의 서정성과 기교를 결합해 이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했다.


곡을 작곡할 당시 쇼팽은 젊은 피아니스트로서 바르샤바의 살롱과 음악회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조국 폴란드의 정세가 점차 불안해지면서 더 큰 유럽 무대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곡은 1830년 10월 11일, 그가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활동하기 전 “고별 공연”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고, 쇼팽이 가장 자신 있는 피아니즘을 선보일 수 있도록 특별히 기획된 작품이었다.


'낭만적인 봄밤의 몽상(夢想)',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


쇼팽은 친구 티투스 보이치에호프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곡의 두 번째 악장을 “아름다운 봄밤의 몽상”에 비유하며, 흐릿하고 은빛빛을 내는 음향을 원했다고 언급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화려함이나 대규모 오케스트레이션보다는 피아노의 내밀한 감성과 섬세함에 더 큰 가치를 두었음을 시사한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모두 세 악장으로 구성되며, 첫 악장 ‘Allegro maestoso’는 웅장하면서도 유려한 오케스트라의 서두에 이어, 피아노가 중심이 되는 서정적 주제와 함께 펼쳐진다. 두 번째 악장 ‘Romance: Larghetto’는 일종의 녹턴에 가까운 노래적 악장이며, 쇼팽이 흠모했던 소프라노 콘스탄차 그워즈카에 대한 이상적 사랑의 정서를 담았다는 해석도 있다. 마지막 악장 ‘Rondo: Vivace’는 폴란드 민속무용인 마주르카 리듬을 차용하여 활기차고 민족적 자부심까지 드러낸다.

이 곡의 스타일적 특징으로는 세 악장 전체에 걸쳐 피아노가 주도권을 갖고 연주를 이끌며, 오케스트라는 다소 단순하고 보조적 역할에 머무른다는 점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오케스트레이션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오히려 피아노의 섬세함과 화려한 기교를 최대치로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 오랜 세월 동안 이 곡을 독보적 협주곡으로 만들었다.


바르샤바 음악계의 신동, 쇼팽이 문을 연 낭만주의 피아니즘


초연 당시, 바르샤바 음악계는 신동 피아니스트쇼팽의 명성에 적잖이 기대를 걸었고, 실제로 연주가 끝나자 “천재적이고 독창적이며 우아한 아이디어가 풍부하다”라는 열광적 언론 평이 이어졌다. 이후 곧장 빈과 파리에서 연주되었을 때에도 쇼팽의 피아니즘과 유려함, 그리고 새로운 낭만주의적 감성이 ‘가장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파리에서는 프랑수아 페티스 같은 음악 평론가들이 “쇼팽의 영감 안에서 새로운 형식의 등장 가능성을 본다”며, 이 대담하고 섬세한 피아노 협주곡이 프랑스 음악계에 미칠 장기적 영향에 주목했다. 그 뒤로도 이 협주곡은 루빈스타인, 아르헤리치, 치머만, 폴리니 등 수많은 거장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으며, 낭만주의 시대 피아노 음악의 전형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쇼팽이 파리로 떠난 직후, 조국에서는 11월 봉기가 발발했고, 그는 결국 망명자의 신분으로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이후 이 협주곡은 고향을 떠나 먼 타국에서 폴란드의 정서와 기억을 담아내는 심리적·예술적 연결고리로 기능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 곡은 피아니스트가 기교적으로 빛을 낼 수 있는 작품임과 동시에, 단순한 과시가 아니라 “노래하는” 피아노 소리와 내면적 서정, 세련된 화성 변화가 빼어난 특징을 보여준다. 쇼팽은 이 작품을 통해 피아노의 새로운 가능성―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과 극단적으로 내밀한 서정의 표현―을 확대했으며, 이후 낭만주의 협주곡의 이상형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의미도 지닌다.

정리하자면,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은 19세기 초중반 프랑스 및 유럽 음악계의 변화기에서 태어난 협주곡으로, 작곡가 자신의 명암이 교차하던 젊은 시절의 예술적 정점이자 폴란드적 고유성과 낭만적 감성이 절묘하게 조화된 의미 있는 작품이다.


■ 역시 이 곡은 2015년 제17회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보여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를 빼놓을 수 없을 듯 하다. 이 결선 무대에서의 연주는 왜 조성진이 대상을 수상할 수 밖에 없었는 지 유감없이 보여준 우승자의 자격을 증명한 연주였다.(다만 음질이 좀 ㅠㅠ)

- https://www.youtube.com/watch?v=614oSsDS734


■ 위안이 필요할 때 자주 듣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2악장 연주도 비교 감상해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jY9Ts0ilqK4


■ 앞서 소개한 이 협주곡의 3악장을 연주한 크리스티안 짐머만은 1975년, 18세의 나이로 제9회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다. 그의 연주로 전곡을 감상해보자. 진정한 쇼팽 스페셜리스트...

- https://www.youtube.com/watch?v=15jzEqKJz-8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 박용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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