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전 오늘의 기억을 되살려 보자

- 2025년 6월 10일 화요일 -

by 최용수

♡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

<가면무도회 모음곡/ Masquerade Suite>


https://www.youtube.com/watch?v=gEr-yDnm704 (1번 왈츠)


달력의 날짜를 미처 셀틈도 없이 6월도 3분의 1이 지나버렸다. 오늘은 6월 10일, 6월 민주항쟁 38주년이 되는 날이다. 1987년 오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시민과 학생들이 동참한 시위가 확산되었다. 그해 이한열 열사 피격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도화선이 되어 국민적 분노와 민주화 열망이 폭발했다. 무려 20일이나 지속된 6월 항쟁은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마다 늘 느끼게 되지만 나라가 위기에 닥쳐 혼돈에 빠졌을 때 자신의 이름 내걸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 나라를 구해 온 소위 '민중'이라는 존재에 전율하게 된다. 지난 비상계엄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다.

오늘 아침은 민중들의 음악, 소위 '민속음악'하면 떠오르는 곡을 골라봤다.




19세기말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민간의 전통 선율과 리듬, 그리고 축제 때 추던 춤곡(마주르카, 폴로네즈, 차르다시 등) 형식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폴란드의 쇼팽에서부터 이후에 '국민음악파'라고 부르게 되는 러시아의 글린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그리고 동유럽의 드보르자크와 바르톡,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그리그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민속음악에 천착하게 되는 이유를, 역사학자들은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전쟁 이후 유럽 각지에서 '민족'과 '민족의식'이라는 개념이 빠르게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왕'이나 '종교'가 아닌, 언어·문화·역사·정체성을 공유하는 공동체로서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개념을 재발견하게 된 것인데 민속음악이야 말로 이런 민족적 정체성을 가장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부터 18세기까지 유럽은 봉건적 질서가 지배적인 사회로 '민족'이란 개념이 거의 없었다. 왕이나 황제가 직접 모든 영토를 통치하기보다는, 각 지역의 귀족(영주, 공작, 백작 등)들이 땅(영지)을 나누어 다스리고, 그 대가로 군사적·정치적 충성을 바치는 체계였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혈연·혼인·상속에 따라 영토가 수시로 바뀌었다. 왕조(예: 합스부르크, 부르봉, 호엔촐레른 등)가 여러 지역을 동시에 다스리는 경우가 많았고, 같은 왕이 서로 다른 나라의 왕위를 겸하는 일도 흔했다. 국가는 왕조, 귀족, 교회 등 지배계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고, 따라서 언어·문화·혈통을 공유하는 ‘민족’ 개념은 필요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자신을 ‘프랑스인’이나 ‘독일인’이 아니라, ‘부르고뉴의 신민’, ‘합스부르크의 백성’ 등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1789)과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1799~1815)이 기존 유럽의 봉건적·왕조적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면서 유럽은 비로소 국민(민족) 단위의 국가, 즉 ‘민족국가’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강력한 프랑스 군대에 의해 유럽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념(평등, 시민권, 법 앞의 평등 등)이 전파되었고, 기존 교황과 절대군주의 일방적 통치와는 다른 근대적인 중앙집권적 행정, 국민군 체제, 나폴레옹 법전과 같은 '시스템'이 확산되었다. 유럽에서 민족과 민족국가 형성이라는 주제는 방대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이후 근-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이라 여기서 더 다룰 내용은 못되지만, 19세기 나폴레옹 전쟁과 낭만주의의 부흥, 그리고 민속음악이 서로 연결되어 클래식 음악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사실만 강조하고 싶다.




<가면무도회> 모음곡은 1941년 모스크바 바흐탕고프 극장에서 상연될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희곡 『가면무도회』 무대음악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루벤 시모노프 감독이 하차투리안에게 음악을 부탁했는데, 하차투리안은 연극의 극적 분위기와 시대적 정서를 반영하여 모두 20여 곡을 작곡했지만, 1944년 부수음악 전체 중 가장 음악적으로 독립적이고, 연주회용으로도 완성도가 높은 다섯 곡(왈츠, 녹턴, 마주르카, 로망스, 갈롭)을 선별해 관현악 모음곡으로 편곡해 다시 발표했다.

다섯 곡은 각기 다른 정서와 무도음악(춤곡) 형식을 대표하며, 연극 줄거리와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는데, 각각은 1곡 왈츠 (Waltz), 2곡 녹턴 (Nocturne), 3곡 마주르카 (Mazurka), 4곡 로망스 (Romance), 5곡 갈롭 (Galop)으로 구성되어 있다.


러시아 시인 미하일 레르몬토프가 1835년에 쓴 희곡 『가면무도회』는 제정 러시아 시기 귀족사회의 허위와 부패, 그리고 질투로 인한 비극(남편 아르베닌이 아내 니나를 오해해 살해하는 이야기)을 다룬 러시아의 인기 있는 고전으로, 이 작품이 쓰여질 당시 소련 당국은 민족적 자긍심과 문화적 자부심을 키우고자 애쓰고 있었기 때문에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연극 <가면무도회>의 초연은 1941년 6월 21일에 이뤄졌으나, 바로 다음 날 독일의 소련 침공(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공연은 중단되고, 극장도 폭격으로 파괴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러시아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한 연극의 부수음악이지만, 서유럽 무도음악(왈츠, 마주르카, 갈롭 등) 형식 안에 러시아적·코카서스적 정서와 민속성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독특한 곡이다.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하차투리안은 1940년대 소련은 물론 서유럽에서도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소련을 대표하는 3대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던 작곡가로 현재는 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계 예기아(일리야) 하차투리안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다음에 다시 하차투리안의 작품들을 소개하며 그의 인생과 음악세계도 함께 살펴볼까 한다.


■ 이고르 마나세로프의 지휘로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연주로 전곡을 감상

- https://www.youtube.com/watch?v=eEVzb-dJyWY


■ 좀 더 편한 감상을 위해 키릴 콘드라신의 지휘로 녹음된 음반버전으로도 감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4952fNeaRs



♡ 깊은 시간


- 박노해


생일 아침 문득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

이렇게 길게 살아남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얕게 미지근하게 오래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생의 깊은 시간을 살다 죽고자 했는데


저 깊은 시간의 강물을 나는 두 번 건널 수 없다


뜨겁게 살다 젊어서 죽어

깊은 시간에 합류한 벗이여

살아남은 나를 너무 노여워 마라

살아 있는 나를 너무 부러워 마라

나는 부끄럽게 아직도 살아남아

깊은 곳을 향해 발버둥치고 있으니


자꾸만 가볍게 떠오르는 들뜬 시대에

부끄럽게 살아남은 나는

살아서는 너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나는


좋았던 벗이여

그래도 몸부림치는 내가 가여워

너는 깊은 시간의 중력으로

내 발버둥에 묵직한 돌멩이로

나를 끌어당겨주고 있구나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282p

"고 박종철 열사 30주기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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