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6월 11일 수요일 -
♡ 프란츠 폰 주페(Franz von Suppé, 1819–1895)
<'시인과 농부' 서곡/ Overture 'Dichter und Bauer'(Poet and Peasant)>
■ https://www.youtube.com/watch?v=gnh0G1EAm54
지난 몇 주전부터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다 복도 창틀에서 녹색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마침내 오늘은 그 정체가 궁금해서 창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풀이 자라고 있었다. 바람이 실려 온 흙먼지들이 창틀에 쌓인 그 얕은 층을 부여잡고 '망초'(구글 렌즈로 찍어보니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로 길가 어디든 볼 수 있는 풀이라고 나온다)가 힘들게 자라고 있었다. 이 놀라운 생명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저 풀씨는 왜 하필 저런 곳에다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까? 20년도 더 된 황대권 선생의 책 <야생초 편지>를 꺼내 들었다. 책을 펼치자 아주 꼼꼼하게 손으로 그린 여러 야생초들의 삽화가 반겨준다. 고단했던 수인 생활을 잊게 해 준 이 놀라운 생명들의 생태가 당신의 고통스러웠을 감옥에서의 기억들과 어울려 감동적인 편지로 되살아났다. 이 야생초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먹으면 좋은지까지.
해가 길어지면서 흙이 보이는 땅이면 어디든 뿌리를 내리고 잎을 올리는 풀들을 우리는 흔히 '잡초 雜草'로 퉁쳐 부르지만, 비슷해 보이는 그 모든 풀들에도 이름이 있고 나름의 강한 개성들을 가지고 이 세상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그들의 이름에 관심조차 없더라도 풀들을 6월의 따가운 햇빛을 땅으로 받아 내려 이 땅을 생명의 터전으로 만든다.
"감옥 마당에서 무참히 뽑혀 나가는 야생초를 보며 나의 처지가 그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밟아도 밟아도 다시 살아나는 야생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닮고자 하였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잡초'이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무진장한 보물을 보며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신뢰하게 되었다"
책의 서문을 다시 읽으며 꼭 수인이 아니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갑남을녀들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우리 모습과 야생초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지만 누가 하나 큰 눈길 주지 않는, 하지만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로 말이다.
요즘 밭에는 이런 야생초들이 농작물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검은 비닐로 도랑을 덮어버린다고 하는데, 제초제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제초제보다 농부의 손길은 더 바빠질 테지만(수확후 뒤처리까지) 그래도 더 생명친화적이라고 해야할까. 아파트 창틀의 놀라운 녹색의 망초를 보는 순간 오늘 아침 음악은 주페의 "흙냄새 나는 농부의 웃음과 시름 깊은 시인들의 사유가 공존하는", 19세기 빈의 초상을 담은 이 곡을 꼭 들려주고 싶었다.
이 곡을 작곡한 주페는 사실 이 작품 외에 그의 다른 작품들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생각보다 덜 알려진 작곡가다. 1819년 4월, 오스트리아 제국 달마티아(현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태어났다. 벨기에-이탈리아계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음악에는 관심이 없던 아버지는 그가 법학을 공부해 정부 기관에서 일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페는 어린 시절부터 플루트와 화성학에 관심을 가지며 음악에 천부적 재능을 드러내고 있었다. 13세에 첫 작곡을 시도했고, 16세에는 교회 합창단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의 자양분을 키워갔다. 결국 1835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빈으로 이주한 그는 제히터와 자이프리트에게 작곡을 사사받으며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이름을 독일식의 프란츠 폰 주페로 개명하고 빈 예술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1840년대 빈은 오페레타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주페는 1841년 예나 극장의 지휘자로 데뷔한 후, 1845년 안 데어 빈 극장과 요제프슈타트 극장에서 지휘자 겸 작곡가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 또한 수많은 오페레타를 작곡했는데, 초기 작품들은 프랑스 오페레타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이탈리아의 경쾌함과 빈 왈츠의 우아함을 융합한 독자적 스타일을 구축했다.
1850년대 후반부터 그는 〈아름다운 갈라테아〉(1865), 〈보카치오〉(1879) 등 31편의 오페레타와 180편이 넘는 희극 부수음악을 작곡하며 대중적 인기를 모았는데, 특히 1846년 작곡된 〈시인과 농부 서곡〉은 초연 당시부터 관객의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냈고, 이후 세계 3대 오페라 서곡으로 꼽히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주페는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가 〈시인과 농부 서곡〉의 출판권을 고작 8마르크라는 헐값에 출판사 요제프 아이블(Josef Aibl)에 팔고 난 뒤 평생 후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그의 오페레타가 가진 대중적 인기와 달리 오페레타 장르의 통속성 때문에 고전주의 음악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예술적 깊이가 부족하다”며 혹평하기 일쑤였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별로 남아있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곡은 원래는 오페레타 작품을 위해 따로 구상되지 않았는데, 극장 측의 요구로 전체 극에서 주제를 가져와 서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곡은 크게 3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트럼펫과 호른의 장엄한 팡파르로 시작하는 서주(Adagio) 부는 팡파르 이후 첼로와 하프가 전원의 평화로움을 묘사한다. 이 부분은 "농부의 일상"을 은유하며, 첼로 솔로는 주페의 이탈리아적 서정성이 배어있다. 이어 전개부(Allegro)에서는 현악기의 격렬한 주법이 "시인의 열정"을 상징하는데, 이는 농부와 시인의 갈등과 화해가 반복되는 희극적 스토리라인을 음악화한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빠른 템포의 행진곡과 왈츠가 만나는 종결부(Presto)는 "시와 농사의 조화, 시인과 농부의 화해"를 선언한다. 2박자의 빠른 리듬에 빈 춤문화의 영향이 드러난다.
20세기에 이 곡은 영화 《톰과 제리》, 《루니 툰》 등에 삽입되며 카툰의 상징음악으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덕에 우리에게도 아주 낯익은 음악이 되었다.
■ 앞서 리카르도 무티 지휘의 빈필하모닉 연주로 감상했다면, 이 못지않게 잘 알려진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의 연주로도 들어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vP06-7NGV8o
♡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