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8월 6일 수요일 -
♡ 모리스 라벨 (Joseph Maurice Ravel, 1875~1937)
<'볼레로' 다장조, M.81/ 'Boléro' C Major, M.81>
■ https://www.youtube.com/watch?v=SS_WJmLGFrA&t=68s
밤새 내린 비조차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제대로 식히지 못한 모양이다. 새벽까지 에어컨 덕분에 뽀송하던 실내 공기가 창문을 열자마자 금세 눅눅해졌다. 때론 불볕더위보다 여름을 더 가혹한 계절로 느끼게 만드는 후덥지근한, 습한데 뜨거운 열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다.
하지만 이 후덥지근한 여름 대기는 식물들에겐 더 없는 성장의 양분인가 보다. 얼마 전 가지치기로 반듯한 모양을 하고 있던 아파트 화단의 화초들이 삐죽삐죽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웃자란 가지들이 많아졌다. 인공적으로 모양을 내기 위해 수평 가지치기를 해놓은 이팝나무와 철쭉나무 가지들은 인간들이 원하는 모양과 속도에 꼭 따라야 할 이유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대신 자연의 시간을 따라 그들의 삶의 속도와 리듬을 맞춰갈 뿐, 웃자랐니 덜 자랐니 하는 나 같은 인간의 생각 따윈 별 의미도 없을 것이다.
지금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 '그들'과 '나'는 모두 고유한 자신만의 속도와 시간으로 지금 이곳에서 스쳐 지나며 만난 것뿐이다.
'튀지 말고 어울려 살아야 한다'와 같은 수십만 년 동안 사회적 동물로 진화해 온 인간들에게 집단, 조직의 룰은 생존의 지혜일 순 있어도 그것이 그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 각자의 삶의 룰(규칙)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어제 모처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아침마다 쓰고 있는 이 클래식 음악일기에 대해 어설픈 강의를 하고 왔다. 누군가에게 내 경험과 지식을 나누고, 이에 대해 공감을 얻는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와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지고, 나보다 더 오래 세상을 살아오신 어른들에게 과연 내가 강의한 내용이 어떤 도움이 되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제 그 수업(?)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핵심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클래식 음악 감상 같은 취미생활을 통해 나만의 삶의 리듬과 속도를 즐겁게 찾아보시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제 그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이미 대부분 그렇게 살고 계신 분들이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조금은 덜 대중적인 타이틀을 걸고 있는 수업을 직접 신청하시고 찾아오셨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부족한 게 많은 강연이었지만, 오늘 이 브런치스토리를 찾아들어와 읽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 같아 감사인사와 존경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오늘 아침에는 그래서 특별히 라벨의 음악 중 '볼레로'를 골라 보았다. 단순한 리듬이 수없이 반복되는 모습은 마치 서로 개성을 감추고 어울려 살아가는 수많은 개인들의 삶을 암시하는 듯 보이지만, 볼레로의 마지막 폭발적 반전처럼 우리 삶은 결코 하나의 리듬과 속도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걸 같이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927년 어느 날 러시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발레리나 이다 루빈슈타인은 라벨을 찾아갔다. 그녀가 라벨을 찾아간 이유는 스페인 피아니스트 알베니즈의 피아노곡을 토대로,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할 무대에 쓸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으로 편곡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곡을 전해 받은 라벨은 도입부의 멜로디에 단번에 매료된다. 하지만, 이 곡은 스페인 지휘자 아르보스가 편곡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었고, 라벨은 결국 편곡 작업을 중단하고 새로운 곡을 쓰게 된다. 그렇게 볼레로의 작곡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아예 실험적인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라벨은 곡의 구상을 끝마치고 친구에게 “들어보게, 이 멜로디는 정말이지 음악사에서 시도된 적이 없네. 처음부터 끝까지 이게 다야. 계속 악기만 바뀌어서, 마지막에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거대한 소리로 마무리될 거야. 정말로, 정말로 이 멜로디가 전부네.”라며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자랑했다고 한다.(이 대화 속 친구가 누구인지 밝혀진 기록이 없지만, 아마 당시 라벨이 교류하던 미셸-디미트리 칼보코레시, 루이 뒤랑, 모리스 들라주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라벨은 '볼레로' 작곡 당시 극도의 단순함과 반복이라는 ‘의도된 제한’을 두고 있었다.
기본 구성은 3/4박자, C장조의 곡 전체를 지배하는 스네어드럼의 오스티나토 리듬의 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 플루트로 시작해 클라리넷, 바순, 오보에, 색소폰 등 타악기와 관악기가 차례로 등장하며 같은 멜로디를 교대로 연주한다. 통상의 화성 전개 없이, 오직 편성의 변화와 점진적 볼륨 고조가 곡 전체를 이끈다.
처음 두 마디의 리듬이 169번 반복되며, 오직 마지막 부분에서만 조성이 변화하며 극적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같은 테마가 8회 이상 반복되고, 마지막 2마디에서야 돌연 전환이 일어난다. 이는 “수학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반복의 미학”으로도 해석된다. 다음은 곡의 진행 순서에 따른 악기 편성을 정리한 내용이다.
1. 플루트 독주 (첫 번째 선율)
2. 클라리넷 독주
3. 바순 독주 (두 번째 선율)
4. 피콜로클라리넷 독주
5. 오보에 다모레 독주 (첫 번째 선율)
6. 플루트와 약음기 끼운 트럼펫
7. 테너색소폰 독주 (두 번째 선율)
8. 소프라니노색소폰 독주
9. 호른, 피콜로 한 쌍, 첼레스타 (첫 번째 선율)
10. 오보에, 오보에 다모레, 코랑글레, 클라리넷 한 쌍
11. 트롬본 독주 (두 번째 선율)
12. 바순족을 제외한 모든 목관악기
13. 피콜로, 플루트 한 쌍, 오보에 한 쌍, 클라리넷 한 쌍, 제1바이올린 (첫 번째 선율)
14. 위의 악기들에 코랑글레, 테너색소폰과 제2바이올린 추가
15. 클라리넷족과 바순족을 제외한 모든 목관악기, 트럼펫, 제1+2바이올린 (두 번째 선율)
16. 바순족과 소프라니노 색소폰을 제외한 모든 목관악기, 트롬본, 콘트라베이스를 제외한 모든 찰현악기
17. 피콜로, 플루트 한 쌍, 피콜로트럼펫, 트럼펫 세 대, 소프라니노색소폰과 테너색소폰, 제1바이올린 (첫 번째 선율)
18. 위의 악기들에 트롬본 추가 (두 번째 선율)
이 곡은 단순하지만 사실 연주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는 주제를 파트별 악기들이 교대로 연주해야 하기에 연주자의 기량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구조인데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같은 리듬을 반복해야 하는 스네어드럼은 긴 시간 동안 흐트러짐이 없이 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통상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는 공연이 끝나고 지휘자가 주요 독주파트나 곡의 활기를 불어넣는 관악 파트를 일으켜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하는데, '볼레로'의 경우 공연이 끝나면 지휘자는 예외 없이 가장 고생한 스네어 연주자를 제일 먼저 일으켜 세워 관중들에게 박수를 받게 한다. 그만큼 일정한 리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게 힘들다는 뜻일테다.
이 곡은 발레를 위해 작곡된 버전과 이듬해 연주회용 버전이 따로 발표되었는데, 발레 버전에서는 두 명의 스네어 연주자, 연주회 버전에서는 한 명이 이를 담당한다.
라벨 스스로 이 곡을 “발전도, 구조적 변화도 없는,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한 한 가지 실험”이라 말했지만 오히려 이런 단순함에서 청중들은 엄청난 몰입과 열광을 경험하게 된다. 꼭 음악 때문만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당연히 이나 루빈스타인 주연의 발레공연 또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28년 파리 초연 무대에서 가장 놀란 것은 라벨 자신이었다. 관객들은 ‘지루할 수밖에 없는 반복’에 오히려 최면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크게 환호했기 때문이다. 이듬해는 오케스트라 연주곡으로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기 시작하면서 이 곡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다.
이 곡은 전통적 클래식 문법(전개, 변주, 발전)을 철저히 배제하고, 단일 멜로디와 리듬·음색의 변주만으로 극적인 예술적 긴장과 해방을 구현함으로써 현대 ‘미니멀리즘 음악의 선구’적이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데, 반복되는 리듬과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선율 속에 ‘집단적 에너지’, ‘인간 본연의 열망’, ‘일상의 반복이 초래하는 폭발적 변화’ 등을 담고 있다는 해석까지 더해지면서 현대 클래식 음악의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되었고, 영화와 무용, 대중음악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모리스 라벨(1875~1937)은 프랑스 바스크 지방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14세에 파리 음악원(콘세르바토르)에 입학한 그는 가브리엘 포레 등 당대 최고의 작곡가 밑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넓혀갔다. 그러나 라벨의 학창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라벨은 자유로운 창작 정신과 혁신적 스타일을 지녔지만, 파리음악원은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던 탓에 라벨은 퇴교와 재입학을 반복해야 했다. 첫 번째 퇴교(1895년)의 이유는 라벨의 규범에 따르지 않는 태도와 자유분방한 창작 성향으로 인해 실기 평가에서 불합격 처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재입학해 다시 작곡을 공부했으나, 여전히 라벨의 새로운 음악적 탐구는 기존 교수진의 기대 사이에 간극이 컸다. 결과적으로 1900년 학업 성적 부진과 작곡대회에서 수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또 한 번 퇴교당한다.
라벨은 프랑스 최고의 젊은 작곡가에게 수여하는 로마대상(프리 드 로마)에 1900년대 초반 5번이나 도전했으나 매번 탈락했다. 특히 1905년 마지막 도전에서는 예선에서조차 탈락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는 음악계와 언론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이 논란은 소위 ‘라벨 사건(L'affaire Ravel)’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사건은 1905년, 로마 대상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레네뵈 교수의 제자만이 결선에 진출하고 라벨을 비롯한 유망한 신예 대부분이 예선에서 탈락하자, 언론과 음악계에서 “노골적인 제자 편들기와 보수적 고착”이라며 거세게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논란이 커지자 당시 음악원장 드보아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라벨의 스승이자 라벨과 같은 혁신적 작곡가를 지지했던 가브리엘 포레가 파리음악원 원장으로 선임되며 파리음악원은 개혁의 물꼬를 트게 된다.
라벨은 번번이 그에게 시련을 안겨준 파리음악원의 보수적 교수들과의 마찰 속에서도 자신만의 독자적 음악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혁신적인 작품들은 1900년이 시작되자마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1899), 《물의 유희》(1901), 《현악 4중주》(1903) 등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다프니스와 클로에》(1912) 같은 대작을 통해 그의 음악 세계를 평단과 대중으로부터도 인정받았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자원입대하여 트럭 운전수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나고 당시 함께 참전했던 전우들을 추모하는《쿠프랭의 무덤》(1917), 19세기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한창 유행했던 빈 왈츠의 화려함과 우아함에 대한 예찬을 담아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의 몰락과 불안, 광기까지 함축해 작곡한 무용시(poème chorégraphique)《라 발스》(1920, 'La Valse'는 왈츠의 프랑스어)는 평단으로부터 고전적 형식과 현대적 감성을 잘 표현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1928년 발표된《볼레로》는 라벨을 현대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라는 클래식 음악사의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작품이 되었다. 라벨은 생이 다할 때까지 다양한 실험을 이어가며 현대 프랑스 음악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라벨은 말년에 신경계 질환으로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인 1937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다른 작곡가들과 비교하면 적은 편이지만, 기존 제도권과의 갈등을 넘어선 혁신적인 작품들로 20세기 음악사의 흐름을 바꾼 불멸의 유산으로 남았다.
■ 구스타프 두다멜이 지휘하는 빈필의 연주로 오케스트라 버전도 감상해 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Dh9bUD-hC0A&list=RDDh9bUD-hC0A&start_radio=1
♥ 첫 마음의 길
- 박노해
첫 마음의 길을 따라
한결같이 걸어온 겨울 정오
돌아보니 고비마다 굽은 길이네
한결같은 마음은 없어라
시공을 초월한 곧은 마음은 없어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 늘 달라져온
새로워진 첫 마음이 있을 뿐
변화하는 세상을 거슬러 오르며
상처마다 꽃이 피고
눈물마다 별이 뜨는
굽이굽이 한결같은 첫 마음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