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어느날, 두려움의 실체와 마주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때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정말 설레고 기대되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는 정말 두렵고 걱정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때.
3월 15일의 밤은 후자에 가까웠다.
예정되어 있는 조직 검사를 '우선'은 미루자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내내 무거운 긴장감이 가시질 않았다.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스로 최악의 순간을 그리고 또 그려봐도
도대체 그 정도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한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3월 16일 오전.
긴장되는 마음으로 조금은 일찍 병원을 향해 나섰다. 여전히 출혈은 조금씩 지속되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가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드라마에서나 들었던 '큰 병원으로 가보세요' 정도였다. 그 이후에 대해선 의학적 지식에 무지한 나로선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니 간호사가 준비된 검사 결과지를 주며 미리 보고 있으라고 안내해 주었다.
의사가 검사 결과를 설명해줄 것이고, 혹시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의사에게 충분히 질문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검사 결과지는 생각보다 두꺼웠다. 스크랩 형태로 되어 있었고, 혈액을 통해 검사했던 다양한 항목에 대해 한 페이지씩 해당 항목의 수치와 그것이 정상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분석 결과가 기록되어 있었다.
사실 여러 번 뒤적였지만, 결과지만 보고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떤 항목인지도 모르는 그 항목이 정상인지 아닌지, 문제인지 문제가 아닌 지 정도만 식별할 뿐이었다.
예정되어 있던 조직 검사를 미루었던 결정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는 해석할 수 없었다.
곧 의사의 호출이 있었고 결과지를 안고 의사와 마주했다.
여전히 수수하고 따뜻한 그 여의사는 결과지 한 장 한 장 최선을 다해 설명해주려 노력했다.
임신 전 혹은 임신 초기에 진행하는 산전 검사의 기본 항목인 풍진, A형 간염, B형 간염 항체 등
이쪽에 문외한인 나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던 항목들에 대한 결과는 무사 통과였다.
A형 간염 항체가 없지만 추후 접종하면 되므로 크게 문제될 부분은 아니라고 했다.
그간 출혈이 길었던 탓에 우려했던 빈혈 수치도 조금 높긴 하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궁 경부암 검사 또한 무사 통과였다. 자궁 내막을 지속적으로 두껍게 만드는 원인으로 의심했던 호르몬에 관한 검사도 큰 이상이 없었다. 결과지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무거웠던 마음의 무게가 1g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요."
점차 가벼워지고 있던 마음에 다시 무겁게 쿵 내려앉은 한 마디를 시작으로 의사의 말이 이어졌다.
"이 항목이 난소암을 진단하는 검사인데 지금 수치가 고위험군으로 나왔어요.
이 부분이 사실 문제가 되서 오늘 진행하기로 했던 조직 검사를 미뤘어요."
난소암을 진단하는 검사인 "R.O.M.A"검사. 이 검사는 CA125와 HE4라는 두 표지를 활용하여 난소암을 예측하는 검사라고 한다. CA125와 HE4 수치가 정상 범위를 벗어나면 고위험군으로 분류하여 '난소암 가능성'이 높은 환자로 예측하는 것이다. 이 검사에서 나는 고위험군 수치가 나왔고, 의사는 지난 번 우측 난소에 있던 두 개의 혹을 아무래도 정밀검사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의사는 나의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세네 번 정도였던 것 같다. 난소암뿐만 아니라 자궁 내막증일 경우에도 이 수치는 높아질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하며 의사는 '암'이라는 한 단어로 인해 순식간에 무겁게 내려앉은 나의 표정과 진료실의 공기를 바꾸려 노력했다.
"오늘 사실 조직 검사를 진행해도 되지만 큰 병원 가셔서 얼른 MRI찍어보시고, 아마 큰 병원에서도 조직검사를 하자고 할 거에요. 애초에 큰 병원에서 검사를 진행하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아 검사를 미루자고 했습니다."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에 있던 대사와, 무의식 중에라도 떠올려 본 적 없던 대사가 뒤섞인 그 날의 오전은 참 맑았다. 의사가 써 준 진료 의뢰서와 두툼한 검사 결과지, 그리고 무겁고도 멍한 마음을 안고 병원을 나섰다.
남편에게 바로 검사 결과를 알리기 위해 문자를 쓰다가 문득 '암'이라는 단어에서 손끝이 멈칫 했다.
그저 가능성일 뿐이고, 아니 꼭 난소암이 아닌 다른 문제 때문에라도 수치가 그리 나올 수 있다 했으니 암은 무슨, 이라는 생각에 '난소암 수치가 높더라'는 내용은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무슨 수치가 높아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더라'라는 메시지만 전달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괜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난소암 수치'라는 키워드로 포털이란 포털은 샅샅이 검색했다.
의사의 말대로 수치가 고위험군이었으나 난소암이 아니라 자궁 내막 증식증이었던 사례, 난소 혹 제거 후 정상으로 돌아온 사례, 다낭성 난소 증후군의 영향으로 수치가 높게 나왔던 사례 등을 용케도 찾아냈다.
난소암 수치가 위험군이라고 해서 꼭 난소암 판정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애써 그러한 사례들만 찾아내어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이 사실에서 벗어나고 위로받고 싶었던 탓이리라.
마음을 진정시키고 의정부 성모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진료 의뢰서를 받았고 최대한 빠르게 진료를 받고 싶다고 전했다. 3월 18일 오전으로 진료 예약을 하고, 다시 검사 결과지를 들여다봤다.
설마,
내가,
아니지.
퇴근한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차마 문자로 전하지 못했던 그 단어를 전달하며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남편 역시, '여보 나이가 몇 인데 걱정말라'며 가볍게 위로했다. 설령, 안 좋은 결과를 듣더라도
치료하면 되는 걸 무얼 걱정하냐는 남편의 이성적인 말이 따뜻하지는 않지만 객관적으로
위로가 되어 주었다.
가볍게 흘려보내고 싶었던 그 날 밤, 두려움과 왠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 결국 한참을 울었다.
눈물로 두려움의 무게를 덜어내고 겨우 그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다.
설마,
내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