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내 남편의 손은 수많은 위로의 말을 대신했다
직장을 다닐 때, 너무 힘들고 지치는 순간이 오면 해서는 안되는 생각인 걸 알면서도,
어디가 아파서 한 일주일 쯤 병원에 입원해서 검사도 받고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어렸을 적부터 큰 병치레 한 번 없이 자란 나였다.
크게 다쳐 입원을 한 적도, 작은 검사조차 받아본 적 없는 나에게
검사, 입원 등의 단어는 그냥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 도피하고 싶은 핑계거리에 불과했다.
어디 아파서 입원이나 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은 생각도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아프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니. 생각 한 번 한 것치곤 실로 엄청난 댓가라 억울하기도 했다.
검사를 받기 전 주말엔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친구가 결혼을 했다.
친구들도 나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기에, 여전히 변함없는 나의 모습으로 그들과 마주했다.
불안감 따위는 잠시만 접어두고, 오늘 가장 행복할 내 친구를 위해 나 또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고 싶었다. 지금 내 삶에서 이 불안감 하나만 없을 뿐인데,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주말이었다.
MRI 검사는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동그랗고 긴 통 안에 들어가서 받는 그 검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노라니, 우습게도 나도 이런 검사를 다 받아보는구나 새삼 어른이 된 것도 같은
묘한 느낌도 들었다. MRI 검사는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춥고 시끄럽고 불편했다.
더욱이 1시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고 한 자세로 누워있어야 한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시끄러운 기계음 때문에 그 한 시간 동안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그냥 빨리 검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었다.
그냥 누워 있기만 했을 뿐인데 검사를 마치고 나오니 피로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두려웠다.
지금 당장, 검사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음 진료일이 되기 전까지는. 그런데도 검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보았던 MRI실 의료진들의 표정이 생각난다. 저 사람들은 날 촬영하면서 무언가를 봤을까?
내 몸 속에 암세포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저 사람들은 검사하면서 혹시 보았을까?
표정이 무언가 심상치 않았던 것도 같은데, 날 환자보듯 보았던 거 같은데...
집에 돌아와 누운 나의 머릿속에는 버려도 버려도 버려지지 않은 일말의 불안감이 여전히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간 날은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봄날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현실은 병원행이다.
잠깐의 봄날을 지나 여전히 겨울인 병원에서 의사와 마주 앉았다.
불안한 표정을 한 나에게 의사는 담담하지만 따뜻하게 검사 결과를 전달했다.
경계성 종양으로 추정된다는 결과였다.
말그대로 추정이었다.
난소에 보이는 혹의 모양이 일반적인 모양은 아니나,
그렇다고 암세포로 보기에는 이른 감이 있어 암으로 발전되기 직전의
경계성 종양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빠르게 MRI검사를 받아보길 잘했다는 말과 함께, 빠르게 수술날짜를 잡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추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초기 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수술을 진행하며 긴급 조직 검사를 진행해보아야 정확한 병명을 확진할 수 있단다.
검사를 했지만 또 다시 수술을 해야 정확히 알 수 있는 결과라니, 뭔가 허탈했다.
결국 수술은 해야했다. 검사 결과가 암이었든, 아니었든 수술해야 한다는 건 예상했지만
의사가 빨리 수술날짜를 잡자고 하니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의사가 경계성 종양일 확률이 더 높다고 했으니 믿어봐야지 생각하다가도,
그렇지 않을 확률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다.
수술 날짜를 잡고 병원을 나서며 밀린 숙제를 하듯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숨겨놓았던 숙제를 하나씩 꺼내어 해결하는 것처럼, 엄마에게 내 상황을 전달했다.
그냥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엄마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는 걸 보니 강해진 게 아니라 강한 척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병원 바깥 세상은 여전히 봄날이었다. 그 봄날 속에서 나만 겨울 외투를 입고 서있는 것 같이 추웠다.
엄마는 괜찮다고, 암은 아닐거라고, 이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 딸은 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아빠 엄마가 하는 말은 내게 모두 옳은 말이었다.
부모님은 내게 착한 딸이라고 했고, 나를 아는 다른 어른들도 한결같이 내게
착한 딸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고 모두 옳은 말이었으니
그 말을 듣지 않을 필요가 없었고, 그냥 그대로 듣고 행동하니 착한 딸일 수밖에.
시간이 흘러 부모님의 말이 모두 맞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
아빠 엄마가 내게 무언가를 특별히 잘못 말해준 것도 아닌데 괜스레 실망스럽고
또 착한 딸로만 자라온 내 지나온 시간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이제부턴 내 주관대로 살아야지 생각했지만 이미 난 착한 딸이라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여전히 난 착한 딸이라, 내가 슬픈 것보다 엄마가 슬픈 게 더 힘들었다.
그리고 엄마가 암은 아니라고 하는 말도,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믿고 싶었다.
애써 괜찮은 척, 강한 척하는 착한 딸의 모습으로 수술날까지 하루 하루를 버텨 나갔다.
수술 하기 전 입원하기 위해 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는 엄마보다 약한 사람이다. 강한 척 하지만 약하다는 걸, 아빠빼고는 가족 모두 알고 있다.
내가 결혼할 때에도 참 많이 우시던 아빠였다.
그래서 난 아빠에게 아프다는 것도, 입원해야 한다는 것도, 수술해야 한다는 것도,
직접 말하지 못했다. 표현하지 않는 아빠지만, 내가 배탈이라도 나서 집에 누워있으면
일하다 말고 죽을 사와서 두고 가는 아빠라는 걸 알기에 직접 말하지 못했다.
이런 아빠와 입원 수속을 밟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내 모습을 보여주고, 아빠는 우셨다.
참, 불효한다 싶었다. 가족들 중 누구든 한 번쯤은 아파야만 한다면, 나이 순으로 아파야 조금은 덜 슬플텐데.
환자복을 입은 나는 참 못나 보였다. 텔레비전에서 여주인공이 환자복을 입은 걸 보면
보호해주고 싶고 참 예뻐보이던데,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이구나 애써 유쾌한 생각들로
수술에 대한 두려움과 또 수술 결과에 대한 불안감을 애써 잠재워보았다.
입원도 처음이지만 수술도 처음인지라, 심전도 검사니 엑스레이 검사니 피검사니 관장이니하는
모든 과정도 전부 낯설었다. 옆 자리의 환자와, 보호자와, 간병인 아주머니들도 낯설었다.
그냥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내 수술은 마지막 타임에 진행된다고 했다. 2~3시쯤 시작할 것이라 했으나,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입원한 날부터 담당 의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나를 찾아와 안심시켜주려 노력했다.
내게 의사라는 존재는, 특히 큰 병원의 의사들일수록, 차갑고 딱딱한 사람들이었다.
전문적이면서 객관적이므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럼 사람들이 내 머릿속 대학병원 의사였다.
그렇지만 이 선생님(앞으로 주치의라 하겠다)은 달랐다. 환자들에게 자주 찾아왔고, 찾아와서 설명해주었다.
의사가 직접 환자의 상태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해주고 앞으로 어떻게 치료하리라 설명하는 과정은
환자에게는 누군가 막연히 괜찮다,라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온도의 위로이다.
주치의는 수술방에 들어가기 전 점심시간에도 찾아와 어떤 과정으로 수술이 진행될 것인지
다시 한 번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우선 오른쪽 난소에 있는 혹을 제거하여 수술 중 바로 조직 검사를 진행하고,
그 혹이 악성으로 판정될 경우 초기 암으로 판정하고 오른쪽 난소 전체를 제거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두꺼워져 있는 자궁 내막 조직을 소파술로 제거하고 자궁 내막 조직 검사도 진행할 것이고 수술 일주일 후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올 것이라 설명해주었다. 우선 수술에 들어가서 최종 병기가 확정될 것이므로 보호자는
항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오른쪽 난소를 제거한다고 해도 추후 임신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의 메시지도 함께 전달해주었다.
그 순간까지도, 부모님과 남편, 나 우리 모두는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암은 아닐 것이다,라고.
오후 3시 30분. 수술실로 가야한다는 호출이 왔다.
이동식 침대에 누워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수술실로 향하는 동안 거짓말처럼 편안했다.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았다. 살짝 울렁거릴 정도의 두려움 정도였지, 내가 예상했던 크기의 무서움은 아니었다.
남편이 수술실로 들어가는 나의 손을 잡아주기 전까진, 수술한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따뜻한 내 남편의 손은 수많은 위로의 말을 대신했다. 울컥, 했지만 잘 참아낸 나를 태운 침대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몇 해 전 엄마를 걱정하며 배웅하던 그 수술실 앞엔, 내가 아닌 나의 부모님과 남편, 동생이 나를 대신하여 서 있었다.
수술실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볼 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암은 아닐 거야, 수술은 잘 될거야, 괜찮아 괜찮아.
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 전체가 무중력 상태인 것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간이 침대에서 수술대로 내 몸이 옮겨지고, 하나 둘 셋, 마취.
너무 추워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다시 그 천장이었다.
연신 춥다는 말만 반복했다. 수술이 끝나고 내가 처음 느낀 것은 말로 설명 안되는 추위였다.
그리고 3시간 정도로 예상했던 수술은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마취가 덜 깬 상태로 병실로 올라온 내게 주치의가 수술 결과를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
가족 모두가 날 에워싸고 있었고, 내게 '난소암 1기'라는 확진이 내려졌다.
아, 나 결국 암이었구나.
마취가 깨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족들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제 정신이었다면, 그래서 모든 것을 맑은 정신으로 마주했다면
그 결과를 더 가슴 아프고 힘들게 받아들였을테니.
첫 번째 수술을 마치고 난 후,
어제와 달리 오늘 난 암환자가 되어 있었다.
하루 사이 참 많은 것이 달라졌고,
그 날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일주일 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