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 가져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첫 번째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우리 고양이, 우리 침대, 우리 소파, 우리 식탁, 우리. 이제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난 수술을 잘 마쳤고, 다행히 초기였고, 그래서 우리의 정상적인 삶을 다시 이어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란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다시 평화롭고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이제 여기에 우리의 아이까지 더해진 새로운 삶을 기대해도 괜찮겠지. 그 삶을 위해 잠깐 힘든 순간을 견뎌낸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개운하고 평온해졌다.
정말 푹 쉬고, 푹 잤으며,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생각만 하며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다.
그 사이 봄은 이미 찾아왔고 기분도 낼 겸 예쁜 봄옷들도 구입했다. 수술 경과를 살펴보고 조직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가는 나의 모습이 누구에게든 환자로 보여지기 싫은 이유가 컸다.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그렇게 병원에 가면 나는 '환자였던' 사람이지 더 이상 '환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자기 위로이고 본능적인 자기 방어였다.
환자 대기 전광판에 내 이름이 올라오니 잊고 있었던, 아니 애써 누르고 있던 긴장감이 다시 스물스물 올라왔다. 마치 처음 진료 의뢰서를 들고 처음 이 병원을 찾아왔을 때의 그 느낌과 같았다. 수술하면서 그 느낌까지 다 떼어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구나 싶은 마음에 불안감이 더해졌다.
-초경은 언제 시작했다고 했죠?
진료실 문을 열고 의자에 앉자 주치의 선생님이 다소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뭐야, 이 분위기는.
이렇게 화사하게 입고 왔는데, 이렇게 밝은 얼굴로 내가 왔는데.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을 해야지 왜 이런걸 묻는거야. 의아하면서도 불안했다.
-원래부터 생리가 불규칙했나요?
점점 질문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무언가 내 예상과는 한참 달라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망가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직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요. 혹시 가족 중에 암에 걸리셨던 분이 있나요?
제발. 예상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예상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 말이 주치의 선생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한 번만 듣고 싶었던 그 말, 이제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말이 또 내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수술할 때 떼어냈던 자궁 내막 조직 검사 결과 '자궁 내막암 1기'에요. 동시 발생으로 추정되네요.
-헐.
참, 웃기다. 애들도 아니고 이 상황에 진료실에 의사 선생님을 앞에 두고 고작 처음 내 입에서 나온 단어가 '헐'이라니. 그런데 정말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이 순간 주인공들은 '그래서 제가 얼마나 살 수 있는데요?' '거짓말이죠?' 등의 대사를 잘만 하던데,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 자체가 나에겐 '헐'이었다.
말그대로 였다. 나는 '난소암 1기'였고, 동시에 '자궁내막암1기'이기도 했다. 전이가 아니라 동시발생암이었다. 뭐라 더 할말이 없었다. 말문이 막힌 내게 선생님은 치료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표준 치료 방법은 '자궁 적출술'입니다. 그런데 환자가 나이도 너무 젊고 임신도 계획하신다고 하니 참... 고민이 되네요.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환자만 생각한다면 표준치료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궁 적출을 하면 아직 초기이기 때문에 거의 완치될 수 있어요. 그런데 치료를 미루고 임신을 먼저 준비한다고 하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될 수 있어요.
자궁 적출이라니. 선생님, 저 아직 삼십대 초반이에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도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이성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정신차려, 안돼.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요?
나는 사실 간절했다. 일을 그만둔 것도 아이를 갖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삶에, 우리 부모님의 삶에 또 다른 형태의 기쁨과 행복이 찾아오기를 정말 원하고 기도했다. 이런 나에게 자궁 적출술을 하라고? 이건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다른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건 표준이 아니고 위험한 방법들이에요. 임신을 준비하다가 암이 전이가 될 수도 있어요. 이건 저의 소견입니다. 필요하시다면 제가 진료의뢰서를 써드릴테니 다른 병원에도 가보세요. 아직 젊고 또 가족들과 상의하실 시간도 필요할테니 충분히 상의하시고 다른 의사의 말도 들어보시고 결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 이 표준치료 말고 다른 치료방법을 권하는 선생님이 있다면 그 쪽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셔도 됩니다. 환자분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선택하세요.
당장 수술하세요. 라는 말보다 위로가 되었다. 다른 의사도 만나고 충분히 나의 미래에 고민하고 그렇게 결정을 내리는 말이었다. 우리 병원 아니면 안돼라는 의사들의 이야기만 들어와서 그런지 신뢰감이 더 생겼다. 주치의 선생님의 눈빛은 안타까움이었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의사 가운 안에 가려져있던 한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냐, 또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이 순간 내게 남은 건 오로지 '긍정'뿐이었다. 어딜가도 자신있게 이야기했던 나의 장점 긍정이 이 순간 제발 제대로 힘을 써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진료의뢰서를 받아들고 병원을 나서며 남편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전화를 걸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울었다. 그리고 모르겠다. 너무 힘든 순간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수화기 너머로 남편에게 전해졌겠지.
남편은 내가 걱정되어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함께 울었다.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왜 우리에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거지.
내 새끼 가져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