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이다.
일요일 저녁의 아파트 단지는 여유롭고 조용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가벼운 발걸음마저 사라진 시간,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은행잎들만이 바닥을 쓸고 있다.
노을이 아파트 단지를 감싸며 상가 건물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다.
짙은 황금빛과 주홍빛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풍경은, 마치 시간의 물결이 지나간 자리처럼 아름답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바람 끝에 담긴 묘한 따뜻함이 느껴진다.
오늘 난 오래된 옷장 속에서 꺼낸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정리하며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세월이 지나도 단단하고 섬세하게 짜인 그 옷은 나의 취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지만, 이젠 다른 누군가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옷이 너무 많아 그중 몇몇은 빛을 볼 기회조차 잃어버린 채, 옷장 깊은 곳에 묻혀 있었으니...
당근마켓에 코트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지금 바로 거래 가능할까요?"
다급하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말투였다.
나는 코트를 품에 안고 집을 나섰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발끝을 스쳤다.
아파트 상가건물에 있는 편의점 앞에 도착하니 멀리서 세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왔다. 갈색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차에서 내렸다. 중후한 분위기와 차분한 발걸음이 돋보였다.
단정한 셔츠에 울 코트, 그리고 반짝이는 구두가 그의 품격을 한층 더해주었다. 첫눈에 풍기는 인상은, 시간이 만들어낸 중후함과 고요함의 총합 같았다. 그는 내게 다가와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당근 맞으시죠?”
나는 쇼핑백에서 트렌치코트를 꺼내 그의 손에 건넸다. 그의 손끝이 코트의 소재를 느끼는 듯, 천천히 옷을 살폈다.
손끝이 옷의 단단한 봉제선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신중하고도 섬세했다.
“정말 좋은 옷입니다. 요즘 보기 드문 디자인이에요,내피도 있어 따뜻하겠네요”
그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입어봐도 될까요?”
그는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옷을 입은 70대로 보이는 노신사는 말 그대로 멋쟁이셨다. 트렌치코트를 걸치니 마치 오래된 영화 속 주인공처럼 멋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분위기가 풍겼다.
“좋은 옷인데 전 자주 입진 못했어요. 이 옷이 어울릴 사람이 더 잘 입어주길 바랐어요.”
그러자 노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코트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문득 그의 중절모와 깊게 패인 눈가 주름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온 세월이 묻어나는 그의 모습...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미래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두 달 후면 40대 후반에 접어든다. 나 역시 언젠가 그와 같은 나이가 될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 몇십 년 후 그와 같은 중후한 모습으로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 60대와 70대는 어떤 풍경 속에 있을까?'
'나는 과연 그 나이에 내 삶의 빛과 그림자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그 나이에 어떤 흔적들을 지니고 살아갈까?'
나는 그 순간 그가 가진 중후함의 무게가 단순히 세월의 흐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긴 삶 속에서 쌓아온 흔적들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잘 입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차에 오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차의 시동이 걸리고, 차는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늦가을의 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하지만 묘하게도 내 마음속에는 작은 온기가 남았다.
옷을 내어주는 간단한 거래였지만, 그것은 단순히 옷 한 벌을 넘기는 일이 아니었다. 지나간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의 나를 그려보는 짧은 의식 같은 것이었다랄까....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내 마음에 "시간이란 것이 내게 남겨주는 흔적들이 한없이 귀하다"는 한 문장이 떠올랐다.
늦가을 일요일 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홀로 서서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묘하게도 내 마음속에는 작지만 분명한 온기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내 삶의 흔적들이 언젠가 고요하고 단단한 무언가로 변할 것이라는 희망의 온기다.
▼ '나의 마음이 글로 피어나는 시간' 신청은 아래 링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