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겨울의 어둠은 아직도 도로 위에 머물고 있다. 눈발이 흩날리며 길 위를 덮는다. 흰 눈이 가득 쌓인 거리엔 인적이 드물다. 어찌 보면 예전 같으면 한창 시끌벅적해야 할 시간인데 수능이 끝나고 어제 내린 폭설 탓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은 마치 세상이 잠들지 못한 채 시간을 멈춘 것만 같은 느낌이다.
출근길 버스에 올랐다. 버스 창문에 기대어 천천히 스치는 풍경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각자 두터운 패딩을 걸치고, 알록달록한 목도리로 목을 감쌌다. 저마다의 색깔이 이 짙은 회색빛 아침에 작은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창밖은 뿌연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만 보인다. 김이 서린 유리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손의 열기가 잠시 흔적을 남기지만 곧 다시 뿌옇게 흐려진다. 그 흐릿함 너머로 보이는 인도 가로수 가지 끝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정적이 깃든 나무들, 눈을 이고 선 가로등, 그리고 한낮을 기다리는 아침 공기. 이 장면은 마치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버스 안은 고요하다. 정막 하다. 버스 밖에서 나는 소음조차 희미하다. 이 모든 것들이 내 눈과 귀를 사로잡으며 내 마음속에서 오래 전의 기억을 끌어낸다.
나는 고개를 숙여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혼자 중얼거린다.
‘이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모든 게 멈춘 것 같네. 저 눈송이 하나하나도, 바람도, 아침도. 이 세상 모든 건 그대로인데 나만 나이가 들어버린 것 같아'
이 길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이, 버스 안에 있는 내가, 그리고 움직이는 버스가, 지나가는 시간들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다 이 낯섦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에도 나는 이런 아침을 느낀 적이 있었다.
눈 오는 날 학교에 가던 길, 손에는 어머니가 짜준 목도리를 두르고 코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뛰었던 기억. 그때는 길이 이렇게 고요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웃고 소리치던 그 어린 날의 활기와 눈부신 하얀 풍경이 문득 내 마음을 물들인다.
‘그땐 세상이 이렇게 크고, 겨울은 끝없이 펼쳐진 것 같았는데.’
나는 다시 한번 생각에 잠긴다.
이제는 40대 후반에 접어드는 내가 이렇게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이 서글플 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때의 아이로 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울 아침의 차가운 공기와 눈송이, 그리고 이 버스의 고요한 진동이 그 어린 나를 깨웠구나...'
아침이 깨어나며 새벽의 어둠은 천천히 물러가고 있다.
창밖으로 퍼지는 여명은 희미하게 스며드는 빛으로 세상을 깨우고 있었다. 쏟아지던 눈발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쌓인 눈 위로 아침 햇살의 흔적이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의 회색빛 풍경이 겨울 특유의 은은한 빛깔로 물들어가는 그 순간, 버스 안의 풍경도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차창에 서린 김이 녹으면서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는 세상. 거리의 전봇대, 눈 덮인 가로수, 그리고 그 사이를 바삐 지나는 사람들. 그들이 뿜어내는 숨결처럼, 버스 안에서도 하루가 시작되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정적 속에 잠든 듯하던 이 작은 공간도 이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저마다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얼굴들. 뒷자리의 젊은 여자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음악의 박자에 맞춰 발끝을 살짝살짝 움직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따뜻하고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건가? 아니면 이 순간에 스며드는 어떤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걸까?’ 나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을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앞자리의 나이 지긋한 남자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무릎 위에 펼쳐 들고 있었다. 그는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따금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떴다. 글 속의 무언가가 그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어쩌면 오래전에 읽은 문장 속에서 다시금 무언가를 발견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 남자의 얼굴에는 한편으로 삶의 깊이가, 또 한편으로는 어린아이 같은 경이로움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창밖만 바라보던 또 다른 승객들. 그들의 눈빛은 각자의 하루를 계획하는 듯 보이기도, 혹은 그저 흐르는 풍경 속에 묻히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는 감긴 눈 속에서 잠과 맞서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듯했다. 마치 이 작은 버스 안에 세상의 여러 단면이 녹아든 것처럼, 모두가 서로 다른 속도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틈에서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이들 모두의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일까. 나는 그저 지나가는 배경일까? 아니면 이들 중 누군가가 나처럼 창밖의 풍경 너머로 어떤 삶을 느끼고 있을까'
내 시선의 끝에서 이 모든 순간들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시간처럼.
‘버스 안의 이 작은 세상이, 하루의 축소판 같다. 여명이 번져 오듯, 시간이 우리 모두를 천천히 감싸고 있구나.’
차창 밖으로 완연히 빛이 퍼지고 있다. 차가운 공기가 여전히 맴돌았지만, 그 속에서도 따뜻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침이 점점 더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나도 하루의 시작을 받아들였다.
‘모두 각자의 겨울을 살고 있다. 이 버스 안에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 이야기들의 배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겠지.’
2024년 올 겨울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어 많은 생각들을 끌어내는 요즘이다. 차갑지만 고요하고, 얼어붙은 것 같지만 그 안에 작은 움직임들이 숨어 있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내 어린 날의 한 장면으로 돌아간다.
손에 꽁꽁 언 눈뭉치를 쥐고 있던 그 손끝의 느낌, 달려도 달려도 멈추지 않던 흰 세상,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설레던 나.
그 순간 어젯밤 아들 학원이 끝나고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빠! 나 오늘 교복이 흠뻑 젖었었어!"
화들짝 놀라 혹여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아들은 환하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과 눈싸움했는데 눈이 사방에서 왔어. 앞에서도 뒤에서도 그런데 너무 즐거웠어"
오늘도 겨울은 나를 지나쳐가고, 나는 그 겨울의 일부가 된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곧 봄이 오겠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좋다. 겨울만이 줄 수 있는 이 멈춤과 사색, 그리고 이 차갑고 따뜻한 시간들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