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하늘은 높고 맑았다. 청명한 가을빛이 도시에 내려앉아 있었다. 살짝 찬 바람이 불긴 했지만, 햇볕이 부드럽게 감싸주어 사람들은 코트 자락을 느슨하게 풀고 거리를 걸었다. 나뭇잎들은 이미 반쯤 떨어져 있었고, 골목마다 은은한 계절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아들과 난다이소를 찾았다.
나는 아들과 장을 보러 다니는 걸 즐긴다. 그의 작은 손이 내 손에 닿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다이소에 들어서 나는 비누와 쓰레기봉투가 있는 진열대로 향했다. 잠시 보이지 않던 아들이 샤프 한 자루를 골랐다며 내게 보여준다. 사달라는 의미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천 원짜리 샤프를 사서 자꾸 망가뜨리고 새로 사는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샤프 자꾸 망가지니까 연필 쓰는 게 어때?”
아들은 민망했는지 아니면 예상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는지 샤프를 들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아들은 이번에는 연필 한 다스와 연필깎이를 들고 왔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사주지 않았다. 집에 이미 충분히 있어서다.
아들은 투정이나 짜증을 부리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다이소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내 마음 한켠으로는 아들이 대견하다 생각했다.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엄마와 함께 길음시장을 자주 다녔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이어지는 시장은 언제나 분주했고, 풍성한 냄새와 소리가 가득했다. 나는 그 길이 좋았다. 엄마의 손을 잡고 걷다 보면, 어김없이 어묵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뜨끈한 국물과 고소한 향이 마음을 붙잡았다.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어묵을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마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셨다. 아직 사줄 수 없다고. 그 말에 나는 실망이 컸다. 어린 마음은 쉽게 상처받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아버렸다. 뭐가 그렇게 속상했는지 눈물이 쏟아졌고, 떼를 쓰며 울음을 터뜨렸다. 시장 골목 한가운데에서 작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는 잠시 멈춰서 나를 바라보셨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모습이,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참 어리석고도 애달프고 죄송한 마음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불행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엄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 손을 다시 잡아주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다음에 사줄게, 오늘은 참자."
엄마의 손길은 너무도 따뜻했다. 울음을 멈춘 나는 다시 시장 길을 걸으며 주변의 색깔과 냄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날의 어묵은 사라진 기억 속에 남지 않았지만, 엄마의 따스한 손길은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아들을 모습이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들의 온화한 눈빛과 어릴 적 나 자신이 너무나도 대조되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나는 그 아들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려 애쓰며 걷고 있다.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나니, 아들이 말했다.
“아빠, 노원문고 갈까?”
나는 웃으며 물었다.
“왜?”
아들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게 재미있어졌다며 새로운 문제집을 사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현실적이었다.
“지금 집에 있는 문제집부터 다 풀고 사자.”
나는 아들의 속마음을 알 것 같았다.
'노원문고에 가서 학용품들을 구경하고 싶은 거구나'
그런 마음도 귀여웠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됐다.
월요일저녁.
퇴근길의 도시 풍경은 금세 어두워졌다.
노란 가로등이 젖은 도로에 점점이 박혔고, 창문에 스치는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아들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아들이 엄마와 수학 문제집을 함께 풀고 있었다. 아내가 아들을 칭찬하는 모습을 보며 뭉클한 마음이 일었다.
아들의 풀이 시간이 끝나자, 아들은 활짝 웃으며 나를 맞았다. 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노원문고 갈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좋아!”
노원문고에 들어서니, 아들은 큰 손(?) 답게 금세 수학 문제집 한 권을 골랐다.
나는 아들의 기쁨을 더해주고 싶었다. 문제집과 함께 수학을 풀 때 사용할 샤프, 지우개, 그리고 그것들을 담을 작은 필통까지 세트를 맞춰 사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들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아들, 그 표정은 뭐야? 샤프에 지우개, 그리고 필통까지 사줬는데 기분이 좋지 않아?"
나는 농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아들은 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 나 지금 속으로 엄청 행복해하고 있어."
그 순간,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아들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행복하다는 단어조차 속으로 삼켜야 할 만큼,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기를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아이의 그런 표정을 보니, 나도 어릴 적 감정을 감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기뻐도 웃음을 억누르고, 슬퍼도 울음을 삼키던 그 시절. 아마 아들도 그런 마음일 것이다. 행복이 너무 커서, 그것을 밖으로 꺼내 놓으면 깨질까 두려운 마음. 혹은 그 행복을 누군가 알아채버리면 그 소중함이 빛을 잃을까 하는 조심스러움.
아들의 작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그 고백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행복을 숨기면서도 내게 알려주고 싶었던, 그 서투르지만 진심이 담긴 말. 나는 그의 조그만 속마음이 담긴 그 말 한마디가, 이 하루를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충분했다.
아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마음이 자라나는 동안, 나는 그의 세상을 어떻게든 더 따뜻하게 지켜주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아들은 새로 산 샤프와 문제집을 펼쳐 들었다. 그는 정말로 즐거운 표정으로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한 문제, 두 문제. 펜 끝에서 흘러나오는 정답처럼,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아내가 놀라며 말했다.
“이야~~~, 스스로 수학 문제집 푸는 사람 누구예요?”
창밖에는 어둠이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달빛은 은은한 베일처럼 거실로 스며들어 사방을 감싸고, 방 안의 모든 것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그 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미묘한 마찰음은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들었다.
'단순한 필기의 울림이 이렇게도 감미롭게 들릴 줄이야'
아들이 문제집을 풀고 있는 모습이 그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작은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집중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순수한 열정이 내 마음을 깊이 흔들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들이 느끼는 행복이 내 안에서 두 배, 아니 그보다 더 커다란 기쁨으로 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의 기쁨이 나를 충만하게 만들고, 그의 작은 노력들이 내 삶을 채우고 있었다.
조명등 아래서, 아들이 샤프로 문제집을 푸는 소리가 마치 조용한 음악 같았다. 펜이 만들어내는 그 가느다란 선율 속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완전한 평화와 행복의 시간이란 것을.
작고 소박한 샤프 한 자루와 수학 문제집 한 권. 그 안에 깃든 따스한 사랑과 진심 어린 마음이 내 가슴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내 마음을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