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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Dec 05. 2024

잔인한 12월의 빛과 그늘

언제까지나 견고하리라 믿었던 시간도, 사람도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다

겨울 아침, 하늘은 싸늘히 내려앉아 있었다.


구름은 햇빛을 가리며 온 세상을 회색으로 물들였고,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늘 같은 길을 걷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무거웠다. 회사 건물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문을 열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은 잔인한 하루가 될 거라는 걸.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사직통보 왔어요.

누구에게나 오는 일인데 생각보다 좀 빨리 왔네요.

잠시 쉬다가 또 다른 일을 위해 뛰어야겠다 생각합니다.

29년 행복한 직장생활이었고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지만 주변의 응원 덕에 무사히 잘한 것 같습니다.

며칠 마음 무겁겠지만 곧 괜찮아지겠지요.
힘이 못 돼서 정말 미안해요...


문자를 읽는 순간, 목이 메었다. 29년 동안 일터를 지켜온 사람이 보낸 이 담담한 작별 인사.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버텨왔을까. 그 시간을 함께 보냈던 나는 그분에게 버팀목이었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짐이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나는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뭐라 말해야 할지... 고마웠다고? 아니면 수고했다고? 그 모든 말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선배님께 내가 느꼈던 진심을 담으려니 한 글자조차 쉽사리 쓸 수 없었다.

결국 진심을 꾹 눌러 담아 짧게 답장을 보냈다.

선배님 항상 보살핌만 받고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겐 항상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든든한 분이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가 떠나도 나의 일상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출근하고, 업무를 하고, 또 퇴근하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 그의 빈자리가 아프게 느껴질 것이다. 머릿속에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이 자꾸 떠오를 것이다.

몇 년 동안 함께 지낸 시간이 스쳐갔다. 그의 조언, 잔잔한 유머, 가끔 엄했던 모습까지 모두 아스라이 멀어질 것 같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힘이 못돼 미안하다"는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문장이 지닌 쓸쓸함과 담담함이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그에게 뭘 더 해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가 미안해하는 말들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건물밖으로 나왔다. 사무실 공기가 너무도 답답했다.


바람이 분다. 겨울 바람이다. 날카롭고 차디찬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우리의 자리도 그렇게 흔들리는 듯했다. 언제까지나 견고하리라 믿었던 시간도, 사람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다......


선배님을 떠나보내며 문득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이 자리를 떠날 날이 올 것이다.


'나도 쉰이 가까워지면 나도 어느 날 구조조정 명단에 이름이 오르겠지...'


그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 순간을 받아들일까. 선배님처럼 담담하게 웃으며 "수고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릴까.


나는 스스로를 위로할 만큼의 시간을 이 회사에서 보낼 수 있을까.


지금의 상황이 내게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때 나는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떠나는 순간을 견뎌낼 뿐일까.

퇴근길,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로등 아래 눈송이가 하얀 빛난다. 그렇게 빛나던 눈이었지만 땅에 닿자 금세 더러워졌다. 사람들의 발걸음에 밟히고 사라졌다. 우리의 시간도, 우리의 자리도 그렇게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이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을 떠올렸다.

"29년 행복한 직장생활이었어요.
며칠 마음 무겁겠지만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는 내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있다고 말해준 것 같았다.

겨울은 춥고 길지만 결국 지나간다. 언젠가 내게도 12월의 잔인한 바람이 불겠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가 내게 남긴 따뜻한 응원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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