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면 태어나는 관계들
그림을 그리기 전 색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색도 없었고, 옷이나 물건을 고를 때도 색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꾸준히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그림도 감상하고, 그러다 현대미술 이야기를 접하면서 "반타블랙(Vantablack)"을 알게 되었어요.
반타블랙은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검정으로, 빛을 거의 흡수해 버려 입체감을 지워버리는 신비한 물질입니다. 특히 이 색을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가 독점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큰 논란이 있었죠. 그는 반타블랙을 자신의 대표 색처럼 활용했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검정 중의 검정, 반타블랙=아니쉬 카푸어"라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되었어요. 어쩐지 아니쉬 카푸어의 전시장에 가면 "반타블랙" 작품이 있을 것 같고, 그의 이름만 들어도 그 독특한 색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죠. 특정 색채가 한 작가나 브랜드를 상징하는 단계까지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고, 상징처럼 작용하는 이 ‘반타블랙’ 같은 색채도 특정인이 독점할 수 있을까요?
국내 상표법은 색채상표란 '기호, 문자, 도형 또는 입체적인 형상 또는 이들을 결합한 것의 각각에 색채를 결합한 것 또는 색채 자체만으로 이루어진 상표'를 말한다고 정하고 있어요. 예전에 색채는 기호, 문자, 도형 등과 결합되어야만 상표로 인정했지만 2007년 초 개정된 상표법은 '단일 색채만으로 구성된 상표'도 상표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개정된 상표법에 따르면 보라 색채만으로도 상표등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등록요건을 만족하면요.
색채만으로 된 상표가 상표법에 의해 등록받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을 만족해야 할까요?
● 사용에 의한 식별력 취득
"색채 상표" "색채만으로 상표가 된다"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저는 상표가 엄청 '크다'라는 느낌이 들어요. 동그라미 형태의 검은색, 별무늬 검은색이 아니라 '검은색' 자체가 상표라고? 이렇게 의문이 생깁니다.
색채 상표도 그렇지만 특정한 한 사람에게 독점을 허락하지 않는 상표들은 '상표가 크다'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큰 상표를 제한하는 조건이 붙고, 그 조건이 "상표법의 사용에 의한 식별력 취득"입니다. 색채 상표를 출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상표권이라는 힘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색채라고 하면 누구나 "아, 그 업체!"라고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사용되고 있어야 한다는 요건이에요.
● 비기능적 표현
색채로만 구성된 색채 상표가 특정인의 권리가 되기 위해서는 지정상품의 품질, 용도 등의 성질을 직접 나타내거나 특정한 색채가 상품의 사용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실용적 기능성이 있지 않아야 해요. '생수'라고 하면 떠오르는 파랑, '안전판'에 사용하는 주의나 경고를 의미하는 노랑과 검정의 줄무늬는 지정상품의 기능을 색채가 설명한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색채는 상표로 등록받기 어렵습니다.
● 상표견본
상표출원을 할 때 작성하는 상표출원서의 '상표견본'에는 내가 상표로 쓸 상표를 기재합니다. 단일 색채로 된 상표는 이 상표견본란을 색채로만 가득 채워야 해요. 공란이 있으면 사각형 모양의 상표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색채 상표의 등록요건인 "사용에 의한 식별력 취득" 요건은 실무상 인정받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출원을 하고도 등록받지 못한 상표들도 많이 있어요. 매출은 물론 영업, 광고, 홍보 등의 노력으로 "색채 자체가" 수요자들에게 충분히 상표로 인지될 정도로 잘 알려졌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를 증명하는 자료를 제출해야 합니다.
국내 특허청에 색채 상표로 등록된 대표적인 예를 살펴볼까요?
● 리고 트레이딩 에스.에이.의 색채 상표
젤리로 유명한 회사의 상표로 국내 특허청에 처음 등록된 색채 상표입니다. 상표견본에 특유의 색채가 가득 채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상표견본의 색채를 보면 바로 젤리 포장의 금색이 떠오르시죠?
● 한국인삼공사의 색채 상표
한국인삼공사의 상징색채도 색채 상표로 등록되었습니다. 제5류와 제29류 2개 분류에 등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상표견본을 보면 한국인삼공사 홍삼 제품의 포장박스가 바로 생각나죠?
관련 판례도 함께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 거예요.
매체와 기술의 발달로 컬러의 표현도 정교하고 섬세해졌어요. 퍼스널 컬러, 색채심리도 색채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습니다. 개인마다 선호하는 색상이 있을 수는 있지만 색채 자체가 법에 의해 보호받는 권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이 요구하는 요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걸 살펴봤습니다.
오늘도 좋아하는 색채를 만나 더 다채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