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면 태어나는 관계들
"작가님 그림으로 굿즈 만들고 싶은데요, 제가 디자인해서 제작해도 될까요?" 작가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 보면 이런 제안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내 그림을 좋아해서 굿즈로 만들고 싶다니 반가우면서도 고민이 생깁니다. 그냥 허락하면 되는 걸까요? 아니면 더 확인해야 할 게 있을까요?
원화의 작가는 물론 원화를 소장한 분, 굿즈를 제작하고 싶은 분 모두 궁금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알아두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2차적 저작물은 원작을 기초로 새롭게 창작성을 더해 만든 저작물을 말합니다. 저작권법에서는 "원저작물을 번역·편곡·변형·각색·영상제작 그 밖의 방법으로 작성한 창작물"이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제가 귀여운 오리 캐릭터를 그린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 오리를 티셔츠에 프린트하는 것 → 단순 복제
∙ 오리를 3D 피규어로 만드는 것 → 2차적 저작물
∙ 오리에 옷을 입히고 포즈를 바꿔 스티커로 만드는 것 → 2차적 저작물
∙ 오리를 주인공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 → 2차적 저작물
단순히 원본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라 새로운 창작이 더해진다면 2차적 저작물이 된다고 보면 됩니다.
2차적 저작물을 작성할 권리는 원저작물의 저작권자, 작가에게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그린 오리 그림의 2차적 저작물을 만들 수 있는 권리는 저에게 있어요. 누군가 제 오리 캐릭터로 피규어를 만들고 싶다면, "그림 사용 허락"만으로는 부족해요. 2차적 저작물 작성까지 허락받아야 합니다.
실제 계약서에는 "A는 B에게 본 계약의 목적 범위 내에서 저작물의 복제, 배포, 전송 및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허락한다."는 조항이 됩니다. 이런 조항이 없다면 원화의 소장자라도 원칙적으로 2차적 저작물을 만들 수 없습니다.
굿즈를 제작할 때 자주 나오는 질문들을 정리해 볼게요.
∙ 제 그림을 그대로 프린트해서 노트 표지로 쓰는 건 2차적 저작물인가요?
단순 복제입니다. 원본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복제권도 저작권에 포함되므로 저작자, 작가의 허락이 필요해요.
∙ 제 캐릭터를 귀엽게 변형해서 스티커로 만들고 싶대요.
이건 2차적 저작물입니다. 원본 캐릭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창작을 더했으니까요. 이럴 때는 2차적 저작물 작성권 허락이 필요합니다.
∙ 제 일러스트에 문구를 추가해서 엽서로 만들고 싶대요.
창작성이 더해지는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단순히 "Happy Birthday" 같은 짧은 문구를 넣는 건 2차적 저작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 있지만, 긴 글이나 시를 결합해서 새로운 작품으로 만든다면 2차적 저작물이 될 수 있어요.
굿즈 제작 계약을 할 때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에 대해 명확히 정해야 합니다.
∙ 라이선스 방식으로 허락하는 경우
"갑은 을에게 본 저작물을 활용한 굿즈 제작을 위한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허락한다. 단, 제작 가능한 굿즈의 종류는 스티커, 엽서, 키링으로 제한하며, 계약 기간은 2년으로 한다."
이 겨우 저작권은 여전히 저작자, 작가의 것이고, 상대방은 정해진 범위 내에서 굿즈를 만들 수 있어요.
∙ 양도 방식인 경우
"갑은 을에게 본 저작물에 대한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포함한 저작재산권 일체를 양도한다."
이 경우 상대방이 2차적 저작물 작성권까지 가져가게 됩니다. 나중에 작가가 직접 다른 굿즈를 만들고 싶어도 상대방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굿즈 제작을 허락했지만, 굿즈의 디자인, 품질 등이 염려될 수 있어요. 작가의 세계관, 신념 등과 맞지 않게 제작되어 유통되면 작가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허락했다고 해서 상대방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계약서에 원저작자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넣어 굿즈의 품질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 "을이 2차적 저작물을 제작할 때는 사전에 갑에게 시안을 제출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며, 갑은 합리적인 사유 없이 승인을 거부할 수 없다."
이런 조항이 있으면 작가가 디자인을 검토하고 최종 승인할 수 있어요. 작가의 캐릭터가 작가 의도와 다르게 변형되거나 브랜드 이미지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 "을은 자유롭게 2차적 저작물을 제작할 수 있으며, 별도의 승인 절차는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계약했다면 굿즈는 굿즈 제작자가 알아서 만들 수 있고, 작가도 간섭할 수 없습니다.
제 오리 캐릭터를 기초로 다른 사람이 피규어를 만들었다면 그 피규어의 저작권은 누구 것일까요? 오리 캐릭터에 대한 권리는 작가인 제게 있고, 피규어 자체에 대한 권리는 피규어 작성자에게 있어요. 그래서 2차적 저작물은 이용할 때는 원저작자와 2차적 저작물 저작자 두 사람의 허락이 모두 필요합니다. 제삼자가 그 피규어를 또 복제하고 싶다면 작가와 피규어 제작자 둘 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굿즈 제작 제안을 받았을 때 확인해야 할 체크리스트를 정리했어요.
∙ 허락의 범위: 단순 복제인가요, 2차적 저작물 작성인가요?
∙ 굿즈 종류: 어떤 종류의 굿즈를 만들 수 있나요?
∙ 승인 절차: 최종 디자인을 제가 확인할 수 있나요?
∙ 계약 기간: 언제까지 유효한가요?
∙ 독점/비독점: 다른 곳과도 계약할 수 있나요?
∙ 수익 배분: 금액은 어떻게 정할 건가요?
∙ 권리 귀속: 만들어진 굿즈의 권리는 누구 것인가요?
계약서 없이 구두로만 약속하고 진행하면 나중에 분쟁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저는 스티커만 만들 줄 알았는데 티셔츠도 만들어서 팔고 있더라고요"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어요.
간단하게라도 "○○님의 캐릭터를 활용해 스티커와 엽서를 제작할 수 있으며, 디자인 시안은 사전 승인을 받습니다. 계약 기간은 1년이며,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은 이 범위 내로 제한됩니다"라고 명시된 계약서를 쓰는 걸 권해드립니다.
굿즈 제작 같은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은 "그림 써도 돼요?"보다 훨씬 복잡한 권리입니다. 내 작품이 어떤 형태로 변형되고 활용되는지, 그 과정에서 내가 어느 정도 관여할 수 있는지, 최종 권리는 누구에게 있을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권리입니다.
작업을 하는 것만큼 작품을 잘 활용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사항도 미리 검토해 두고, 사안이 발생하면 계약서를 꼼꼼히 쓸 권도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