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면 태어나는 관계들
화가들은 그림을 판매해요. 그림을 디지털화해서 인쇄물로 판매하기도 하고, 원화를 판매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림을 그려 단체전과 개인전을 했고, 전시를 통해 그림이 컬렉터들에게 판매되었어요. 원화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서 그림이 판매되어 컬렉터에게 인도되면 그림을 그린 사람도 그림을 다시 보기 어렵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이고 저작권이 있는 그림을 판매하면 저작권도 컬렉터분에게 넘어가나요?
• 저작권이 인정되는 그림, 소유권도 인정되나요?
그림은 미술저작물로 저작권이 있고, 저작권은 저작물에 법이 인정하는 힘이라고 앞에서 살펴봤어요. 한편, 소유권이란 물건을 전면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권리로, 재산권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권리입니다.
창작물로 인정되는 저작물에는 저작권이 발생하지만, 창작물은 물건이기도 하므로 소유권도 인정됩니다. 하나의 창작물에 저작권과 소유권 모두 발생할 수 있어요. 이처럼 하나의 대상에 모두 인정되는 저작권과 소유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 주세요.
소설책을 예로 들어볼까요?
오늘 서점에 가서 소설책 한 권을 샀어요. 읽고 싶은 소설책 몇 권을 검색하고 목차와 한두 챕터 내용을 살펴봤어요. 목차의 구성, 저자의 신념과 논리, 문체, 책의 구성 등이 저에게 가장 잘 맞는 책을 골랐습니다. 저의 구매 결정은 책의 내용, 구성, 문체, 저자의 가치관 등을 고려한 것이지만, 제가 산 것은 소설‘책’이에요. 저는 이 책의 주인이 되었고, 소유권을 취득한 것입니다.
책의 소유권을 취득했으니까 자를 대고 반듯하게 줄을 긋든지, 중요한 부분을 오려내어 노트에 붙이고 요약정리를 하든지, 문득 떠오른 영감을 책에 메모하든지, 책의 내용을 나누고 싶은 친구에게 선물하든지 제 마음대로 책을 활용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산 소설책의 내용으로 저자의 동의 없이 연극 대본을 작성하거나 웹툰을 그리면 안 됩니다. 이는 저자의 저작권이므로 적법한 연극 대본, 웹툰의 작성은 저자의 동의를 받아야만 합니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표현된 ‘소설책’에는 저작권법과 물권법이 함께 적용되며, 보호의 범위가 다릅니다.
• 그림으로 설명해 주세요.
'벽화'에 대한 독일 법원의 판단을 살펴볼까요?
1912년 독일제국법원은 ‘사이렌 판결’이라고 불리는 사건에서 “저작권은 기본적으로 소유권과 관계없이 행사될 수 있고, 소유권은 저작권과 관계없이 행사된다”라고 판단했어요. 저작권과 소유권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선언한 판결입니다.
한 예술가가 베를린의 계단집에 ‘바위섬의 사이렌(Felseneiland mit Sirenen)’이라는 제목의 프레스코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아 완성했다고 해요. 그 집의 여주인은 예술가의 동의 없이 이 프레스코화에 있는 나체의 사이렌에 옷을 입히는 덧칠을 했어요.
하급심 법원은 여주인에게 덧칠을 제거하라고 선고했고, 제국대법원은 여주인의 상고를 기각하여 저작권과 저작물의 소유권을 구별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후에도 독일연방대법원은 이 판결을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합니다.
• 국내 법원의 입장
우리나라의 판례(서울지방법원 1995.6.23. 선고 카합9230 판결)도 유명인이 작성한 편지의 경우 '편지‘지’에 대한 소유권과 편지의 ‘내용’에 대한 저작권은 별개라고 판단했어요.
즉, 제가 유명한 작가가 되어 저의 독자에게 손글씨로 감사의 편지를 써서 선물한 경우, 제가 손 편지를 쓴 편지지의 소유권과 편지의 내용의 저작권은 각각 다른 사람의 것이 됩니다.